조용한 기도
경배와 찬양 _ 찬송가 10장 전능왕 오셔서
신앙고백 _ 사도신경(새번역)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교독문 _ 63번 시편 143편
(인도자)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회중)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인도자)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
(회중) 대대로 주께서 행하시는 일을 크게 찬양하며 주의 능한 일을 선포하리로다
(인도자) 주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위엄과 주의 기이한 일들을 나는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
(회중) 사람들은 주의 두려운 일의 권능을 말할 것이요 나도 주의 위대하심을 선포하리이다
(인도자) 그들이 주의 크신 은혜를 기념하여 말하며 주의 의를 노래하리이다
(회중)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인도자)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회중) 여호와여 주께서 지으신 모든 것들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성도들이 주를 송축하리이다(1-10)
송영 _ 찬송가 2장 찬양 성부 성자 성령
기도 _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찬양 _ 325장 예수가 함께 계시니
말씀 _ 누가복음 8장 26~39절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마가복음(5:1-20)과 마태복음(8:28-34)과 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3개의 복음서에 기록된 오늘의 말씀은 예수님에 관한 또 하나의 중요한 단어를 떠올리게 합니다. 바로 권능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의 권능을 암시하는 일련의 사건들의 한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 바람과 물에 대한 권능(8:22-25)
- 더러운 귀신들에 관한 권능(8:26-39)
- 질병과 죽음에 관한 권능(8:40-56)
이 세 가지 사건들은 마가복음의 순서를 따른 것입니다. (4:35-41; 5:1-20; 21-43).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의 도시, 거라사 지방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거라사(Gerasa)는 갈릴리 호수와 사해 사이 요단 강 동쪽에 위치한 데가볼리에 속한 한 지역으로 ‘가다라’는 이 지역에 있는 한 성읍, 또는 그 지역을 말합니다.

“그들은 갈릴리 호수 건너편에 있는 거라사 사람들의 지방으로 배를 타고 갔다.”(눅8:26)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이 주로 사는 지역으로 건너가신 것은 오늘 본문이 처음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갈릴리 맞은 편”이란 표현은 지리적 목적지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경계들을 넘어 말씀을 전하시고 자신의 권능을 드러내셨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 다가갈 때의 폭풍들
제자들이 호수를 건너가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대답 1: 건너편으로 가기 위해서이다.
대답 2: (본문에 근거하면)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8:22).
오늘 본문은 8장 22절에서 시작됩니다. “호수 건너편으로 가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배를 타고 가는 동안 폭풍우가 몰아치자 제자들은 잠시 잠드셨던 예수님을 깨우며 말합니다. “주님,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비바람이 어마어마할 때, 두려움과 공포심을 갖게 될 때 우리는 폭풍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말씀에서 등장하는 폭풍은 초대 교회가 “건너편으로 가라” 또는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수행할 때의 폭풍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교회가 가려는 목적지가 “호수 건너편”이라면 “폭풍”을 예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너희 믿음이 어디에 있느냐?”는 예수님의 물음에 대답을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그 때 우리의 믿음은 예수님의 권능을 보게 될 것입니다.
“폭풍은 곧 멈추고 잔잔해질 것입니다.”
이방인 선교- 맞은편에서의 사건들
귀신 들린 사람?
예수님께서 거라사에 도착하셨을 때 한 사람을 마주합니다. 그는 옷을 입지 않고, 무덤에서 살고, 광야로 나가곤 했습니다. 그가 귀신들린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이름을 물으셨을 때 그는 대답합니다. “군대”
오늘 본문의 저자는 누가입니다. 누가의 직업이 의사였다는 점을 주목해 보면 신학자 컬페퍼(Culpepper)는 다음과 같이 본문을 설명합니다.
거라사의 귀신들린 사람의 이야기는 지금 하루하루를 억압, 두려움, 걱정이나 강박 행동과 싸우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확신과 희망의 말을 전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 사람들은 귀신들린 사람이 어째서 자신의 이름을 “군대”(“군단,” “떼 ”)라고 말했는지를 이해할 것이다. 귀신들린 사람은 그의 대답에서, 자신이 더 이상 한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는 그의 이름을 잃어 버렸다. 그는 그의 개성을 잃어 버렸다. 남아 있는 모든 것은 갈등하는 세력들의 들끓는 투쟁뿐이었다. 마치 로마의 군대(legion,군단)가 그 사람 안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 같았다. [Culpepper (Luke, New Interpreter's Bible)의 p. 188]
귀신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귀신들”에 관해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귀신들린 사람은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더러운 영, 악은 실재합니다. “악한 세력들이나 파괴적인 세력들” 곧, “사람들을 비인간화시키는 사람들이나 상황”은 늘 실재해 왔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Culpepper의 말처럼, “악이 가고 싶은 길을 갈 때에, 악은 항상 파괴적이고, 궁극적으로는 자기 파괴적이다.” [p. 187]
우리 이야기에서, 귀신들은 늘 파괴적입니다. 그들은 사람에게만 파괴적인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고 싶은 길을 갈 때에조차도, 만나는 모든 것들을 멸망시키고, 결국에는 스스로를 멸망시킵니다.
오늘의 세계에서, 악은 무시무시한 실재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악’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는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주제가 예수님의 권능입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권능이 부정한 무덤 지역과 이방인 영토에서조차도 귀신들의 힘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쫓아내는 권능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이름을 “군단/군대”이라고 밝히게 하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신학자 젠슨(Richard Jensen, Preaching Luke's Gospel)은 누가복음의 주제들 가운데 하나가 “포로들에게 자유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가 악마들에 관한 예수의 권능을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징조로 이해하는 것이 분명하다.” [p. 104]
사람들 (믿을 수 없는 반전)
예수님은 명령으로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하지만 두려움에 빠진 사람들은(35,37절) 예수님을그들 앞에서 쫓아냅니다.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이에 관한 다양한 해석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께서 그들의 현재상황을 혼란스럽게 한 것과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해, 예수는 그들의 “편안한” 삶을 방해했다.
“우리는 성장하고 변화하게 하는 자유를, 일상의 안전과 기꺼이 맞바꾸고 있다.” [Herbert Anderson< The Family and Pastoral Care>p. 41]
틀에 박힌 일상에서 벗어나는 것은 우리가 정확하게 어디로 가는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것은 두려움을 준다. 누군가가 또한 이렇게 논평했다. “미국사람들은 모든 일이 더 잘 되기를 원하지만 아무것도 바꾸기를 원치 않는다.” 이것이 바로 회중들의 삶의 특징이다.
두 번째 이유는 경제적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향이 경제에 미칠 때 공동체와 매우 많은 관련이 있다는 것은 여전한 사실이다. 복음은 경제에 영향을 준다. 왜냐하면 치유, 회심들, 그리고 기독교 윤리의 채택은 철저하게 수입과 지출(또는 이익과 손실)에 영향을 준다. 거리사의 사람들은 그 사람이 고침 받은 일로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는다. 그들은 손실을 계산하고, 그것이 지나치게 많다는 것을 알았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빌립보(사도행전 16:16-39)에서 뿐만 아니라. 에베소서(19:18-34)에서 또한 복음에 일제히 반대하는 강력한 세력들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젊은 사역자들을 교육할 때의 여전히 어려운 점은 하나님의 통치에는 적들이 있고, 그 적들은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가운데 거주하고 있고, 그 누구도 계속되는 갈등들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당신이 도움을 주고자 하는 사람이 당신에게 떠나라고 요청할 때 받는 고통은 그 어떤 다른 고통에 비교할 수 없다. [pp. 117-118]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의 반응과 달리 이 이야기의 끝은 그의 구원에 있습니다.
그는 인간다움을 회복합니다. 그는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고, 예수의 발치에 앉아 있고, 그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NRSV역본에서 “고침 받은”으로 번역하고 있는 36절의 헬라어 단어는 소조(sozo)인데, 이 단어는 “구원 받은”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귀신들린 그의 상황은 변한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의 상황은 악화되었고 그의 주변은 이제 그런 그를 이용합니다. 이것이 악순환의 고리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편안하고 또 믿을 수 없지만 그런 상황을 통해 이윤을 취합니다. (귀신들린 그가 나음으로 많은 이들이 손해를 입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은 그러한 그의 상황이 주제가 아닙니다. 그의 상황이 그가 처한 현실이 절절하여 이야기에 힘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주제는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예수님의 권능에 있습니다.
권능(權能, power)은
성경에서 유한한 인간의 힘과는 결코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탁월하고 위대하신 능력(the excellency of power)을 가리킵니다.(출 8:19; 13:14; 15:6; 느 1:10). 곧, 하나님의 권능은 온 우주 만물의 창조와 경영(시 65:6; 66:7; 102:25; 요 1:3, 10; 골 1:16)에서 뿐 아니라 공의로 악을 심판하고 멸하시며(욥 37:23), 긍휼과 자비로 죄인을 회개, 중생, 부활케 하여 구원하시는 데까지(요 5:21, 25-26; 벧전 1:5)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거라사로 건너가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와 함께하는 모든 이들의 회복을 기도합니다. 동시에 우리에게 권능이 임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찬양 _ 405장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
주기도문(새번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