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기도

경배와 찬양 _ 찬송가 15장 하나님의 크신 사랑

신앙고백 _ 사도신경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말씀교독 _ 교독문 72번 이사야 58장

(인도자)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회중)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인도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회중)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인도자)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같이 비 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회중)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인도자)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회중)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인도자)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회중)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인도자)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회중)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다같이)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6-11)

송영 _ 찬송가 3장 성부 성자 성령

기도 _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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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_ 찬송가 310장 아 하나님의 은혜로

말씀 _ 마태복음 20장 1~16절/ 은혜의 눈을 뜨라

1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2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3 또 제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4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그들이 가고
5 제육시와 제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6 제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7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8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9 제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10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마태복음 20장이지만, 우리는 19장에서부터 시작된 마태복음의 새로운 단락이라는 큰 흐름 속에서 이 비유를 이해해야 합니다.
19장은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라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이 마무리되고, 이제 예루살렘을 향한 수난과 십자가의 길, 즉 주님의 운명을 향한 여정이 시작되었음을 암시합니다.
신학자 젠슨(Jenson)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위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그를 따르는 제자직이 무엇인지, 그리고 천국의 자녀들이 당시의 문화적 기대와 어떻게 다르게 살아가는지를 가르치기 시작하십니다. 결혼, 이혼, 금욕, 지위, 특권, 재물 등 삶의 모든 영역에서 기독교 제자직의 철저한 특성을 제시하시는 것입니다.
카터(Carter)는 19장과 20장에 “하나님의 나라란 또 하나의 대안 가정”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당시 헬라-로마 사회에서 가정은 남편과 아내, 아버지와 자녀, 주인과 종이라는 위계적 체제와 남성의 부 획득 의무로 구성된 가부장적·성차별적 구조였습니다. 힘의 역학에 의해 통제되던 세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가정 구조와 주제들을 가져오시되, 문화적 규범을 따르지 않고 철저히 해체하십니다. 남편과 아내는 지배 관계가 아니라 ‘한 몸’을 이루고(19:3-12), 하나님 나라에서는 모두가 어린아이일 뿐 부모라는 위계가 없으며(19:13-15), 부와 지위를 획득하는 것이 제자직이 아님을 선언하십니다(19:16-30). 또한 모두가 종이며 주인은 없고(20:17-28), 눈먼 자들이 치유받아 새로운 삶을 살아가듯(20:29-34) 제자들은 세상을 거스르는 전적으로 다른 삶으로 부름받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보링(Boring) 역시 이 단락을 “수난을 향해 가는 길에 제자들에게 주시는 가르침”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질서와 가치관을 철저히 뒤엎는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반전, 곧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는 법칙”(19:30; 20:16)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과 포도원 일꾼: 두 세상의 충돌

20장 1절은 접속사 ‘왜냐하면(gar)’으로 시작합니다. 이는 20장의 포도원 품꾼 비유가 바로 앞 19장 16–30절에 나오는 부자 청년 이야기와 인과적으로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신학자 롱(Long)은 부자 청년의 이야기에서 “두 개의 다른 세상이 충돌한다”고 지적합니다. 하나는 공로와 풍습, 자기 의로 살아가는 세상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 나라에서 요구되는 철저히 새로운 은혜의 세상입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과의 교제 밖에 머물게 된 것은 그가 겉으로 악한 짓을 저질렀기 때문이 아닙니다. 계명을 잘 지켰다는 자부심, 부유함이 자신의 의로움과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생각이 오히려 불가능한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부가 스스로를 의롭게 하려는 인간의 기본적 욕구를 강화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20장의 포도원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의 관대함을 못마땅하게 여긴 첫 번째 일꾼들 역시 동일한 한계에 갇혀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받은 일당을 ‘주인의 선한 은혜와 선물’로 여기지 않고, ‘내가 수고하여 마땅히 받아낸 댓가’로 여겼습니다.

품꾼들에게 임금을 지불하다: 부당함과 ‘공평’의 진짜 의미

비유의 본론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아침 일찍 고용된 첫 번째 일꾼들은 하루 일당으로 ‘한 데나리온’을 약속받고 포도원에 들어갔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가난한 한 가정이 하루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생계비였습니다.
이후 제3시, 6시, 9시, 그리고 일하기 직전인 제11시(오후 5시)에도 주인은 시장에서 놀고 있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며 “상응하게(dikaios, 합당하게/공평하게)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저녁이 되어 주인은 나중 온 사람부터 시작하여 모두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을 지급합니다. 그러자 아침 일찍부터 일한 자들은 불평을 터뜨립니다.
“우리를 온종일 수고하고 더위를 견딘 우리와 저 나중 온 사람들을 똑같이 대하십니까?”
13절에서 주인은 불평하는 자에게 “내가 네게 잘못한(adikeo) 것이 없노라” 하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잘못하다(adikeo)’라는 단어는 4절의 ‘상응하다/합당하다(dikaios)’와 직접적으로 대응됩니다. 즉, ‘부당하게 행하다’ 또는 ‘공평하지 않게 대하다’라는 뜻입니다.
일꾼들이 스스로 부당하다고 느낀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 자신이 타인과 스스로를 비교하고, 자신의 수고에 근거하여 더 많은 것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주인은 그를 향해 “친구여(hetairos)”라고 부릅니다. 마태복음에서 ‘친구(hetairos)’라는 단어는 따뜻한 애정이 담긴 단어(philos)가 아닙니다. 마태복음 22장 12절의 예복을 입지 않은 손님, 26장 50절에서 예수를 배반하는 가롯 유다를 부르실 때 사용된 서늘하고 거리감 있는 단어입니다. 주인의 뜻과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겉도는 자를 향한 안타까운 호칭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공평(Fairness)’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세상이 말하는 공평은 ‘사용한 시간과 노동량에 따른 차등 지급’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적 차원에서 공평을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는 것”으로 정의해 봅시다.
집주인은 모든 일꾼에게 한 자신의 약속을 신실하게 지켰습니다. 첫 번째 일꾼들과 합의한 금액은 한 데나리온이었고, 그들은 정확히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집주인은 그 어떤 거짓이나 속임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중 온 자들에게 약속한 “공평한(dikaios) 지급”에 대해, 주인은 그들 역시 하루를 살아갈 수 있도록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이 ‘공평’하다고 친히 결정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결정하신 공평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세상의 문제와 타인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공평과 방법에 대해 감히 부당하다고 논쟁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느냐?”: 완악한 마음과 죄의 관점

지난 설교에서 우리는 인간의 완악한 마음과 죄, 그리고 악의 본질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15절은 이 죄와 완악함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영문 성경(NIV)이나 원어적 의미를 보면 이 구절은 “내가 선하기 때문에 네 눈이 악하냐?(Is your eye evil because I am good?)”라고 번역됩니다. 성경에서 ‘악한 눈(Evil eye)’은 탐욕과 시기, 그리고 타인의 복을 배아파하는 완악한 마음을 뜻합니다.
첫 번째 일꾼들의 진짜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첫째, 탐욕과 비교입니다. 약속된 한 데나리온에 감사하기보다, 남과 비교하여 더 받기를 바라는 욕심이 은혜를 앗아갔습니다.둘째, 위계의식입니다. “우리”와 “그들”을 나누고, ‘온종일 수고한 우리’가 ‘한 시간밖에 안 일한 그들’보다 우월하다는 세상적 가부장·위계 질서를 하나님 나라 안으로 가져왔습니다.셋째, 사명을 짐으로 여기는 완악함입니다. 주인의 포도원에 먼저 부름받아 하루 동안 일할 수 있었던 특권과 은혜를 감사함이 아니라 ‘지겹고 억울한 노동의 짐’으로 여겼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자칭 선함(자기 의)’이 어떻게 완악한 죄와 악으로 변질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스스로 계명을 잘 지키고, 종일 수고하며, 남들보다 더 경건하다는 생각—즉 ‘나의 선함’에 사로잡힐 때, 우리의 눈은 무서운 비늘로 가려집니다. 내가 이룬 공로와 선함에 눈이 멀어버리면, 자격 없는 다른 이에게 조건 없이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압도적인 선하심(은혜)을 오히려 ‘불공평’하고 ‘악한 것’으로 오해하게 됩니다.
내가 나 스스로를 의롭다 여기는 순간, 타인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는 불쾌한 일이 되고 맙니다. 마태복음 18장의 용서할 줄 모르는 종처럼, 나는 1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받았으면서도 100데나리온 빚진 동료의 목을 잡는 완악함에 빠지는 것입니다.

결론: 은혜의 눈을 뜨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하나님 나라의 계산법은 세상의 계산법과 다릅니다.
포도원 주인이 온종일 놀고 있던 마지막 일꾼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준 것은, 그들의 노동 가치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그 가난한 한 가정이 오늘 밤 굶지 않고 살아남기를 바라는 주인의 긍휼과 사랑이었습니다. 주님의 관대함은 동일한 임금을 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소외되고 자격 없는 모든 자를 포도원으로 초대하시는 그 자체에 있습니다.
우리는 포도원에 아침 일찍 들어온 자들입니까, 아니면 오후 5시에 겨우 부름받은 자들입니까?우리 역시 본래 아무 자격 없이 오후 5시에 주인의 은혜로 부름받은 자들입니다. 설령 우리가 남들보다 먼저 부름받아 더 오래 수고했을지라도, 그 수고조차도 주님의 포도원 안에 거하는 은혜의 특권이었습니다.
나의 공로와 자격이라는 완악한 눈을 거두어냅시다.“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느냐?” 하시는 주님의 음성 앞에서, 나의 선함이라는 오만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선하심만을 바라봅시다.
하나님의 공평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함이며, 하나님의 관대함은 절망에 빠진 모든 이에게 살 길을 열어주시는 은혜입니다.

나의 선함이 아닌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하나님의 자애로운 뜻을 깊이 새기고 살아갈 때, 우리는 세상을 향해, 그리고 다른 이들을 통해 주님의 빛(Light)을 보는 능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 깊은 은혜와 공평의 비밀을 깨닫고 주님의 선하심을 깊이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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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_ 찬송가 419장 주 날개 밑 내가 평안히 쉬네

주기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