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기도

경배와 찬양 _ 찬송가 15장 하나님의 크신 사랑

신앙고백 _ 사도신경(새번역)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말씀교독 _ 교독문 96번 어린이주일

(인도자)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회중)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인도자)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회중) 이것이 그의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시127:3-5상)
(인도자)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회중)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인도자)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회중) 천국에서 큰 자니라
(인도자)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회중) 곧 나를 영접함이니(마18:3-5)
(인도자)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
(회중)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다같이)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22:6)

송영 _ 찬송가 _ 1장 만복의 근원 하나님

기도 _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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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_ 찬송가 182장 강물 같이 흐르는 기쁨

말씀 _ 누가복음 24:13~35, 예수님의 임재와 부재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오늘의 말씀 누가복음 24장은 13~35절은 시간적으로 부활절 아침 이후 날이 저물기까지의 사건을 전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은 ‘여자들’을 통해 온 예루살렘에 퍼져나갔습니다. 빈 무덤, 사라진 시체, 여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였지만 제자들은 ‘여자들’을 믿지 않았습니다. 오직 베드로만 다시 그 무덤을 찾아 예수님의 수의만이 남겨진 것을 확인하고 스스로 이상하게 여기며 돌아갔습니다.

바로 그 날, 이름 모를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고 있었고 그 길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마가도 같은 사건을 마가복음 16장에서 짧게 전하고 있습니다.

12: 그 후에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가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다른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
13: 그들이 돌아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렸지만 역시 그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누가는 마가와 다르게 구체적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A1 두 사람이 예루살렘을 떠남(13-14절)

B1 예수님이 그들에게 오시다 (15절)

C1 그들은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다(16절)

C2 그들은 예수를 알아보다(31a절)

B2 예수님이 사라지다 (31b절)

A2 두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다(33-35 절)

예수님과 함께 걷는 길 위에서

두 사람이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습니다.

엠마오(Emmaus)는 히브리어 ‘하마’에서 유래된 말로, ‘따뜻한 샘’, ‘온천’이란 뜻입니다. 예루살렘 근처(누가는 ‘이십오 리’ 곧 약 10㎞ 떨어졌다고 기록함)의 한 마을로 정확한 위치나 거리는 불명확합니다.

이 엠마오로 가는 길 위에서 두 사람이 17절의 표현처럼 ‘슬픈 표정’으로 길을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 때 그 길 위에 예수님이 등장하셨고 그들의 곁에서 걸으시면서 이야기를 건네십니다.

“무슨 말들을 하고 있는 것이요?”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곁에 계신데 알아보지 못하다니요? 심지어 예수에 관해 말을 하고 있는 중인데 말입니다.

Tannehill (The Narrative Unity of Luke/Acts)은 다음과 그들이 보지 못함(맹목)의 원인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길들이 그들 자신의 목적과 성취방법의 견지에서 사건들을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무의미하게 보인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은 사람의 눈을 주관하신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메시아가 제자들에게 의미가 있으려면,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어떻게 구원을 이루시는지는 보는 새로운 시력이 주어져야만 한다.” [p. 282].

우리는 왜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들의 ‘슬픈표정’이라는 표현에 주목해보면 그들은 아마도 그들의 슬픔으로 인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그들의 기대에 사형선고가 내려졌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그분이 이스라엘을 속량해 주신 바로 그분이시길 기대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일어난지도 이미 사흘입니다.

그들은 희망을 상실하였고, 그들의 기대가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에게 예수께서 곁에 걸으시며 다시 말씀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그 길을 걸어가십니다. 우리가 알아보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때에도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여러분은 믿으십니까?

 

예수와 함께 하는 식탁에서

엠마오로 가는 길에 이미 날이 저물어 저녁 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예수님께 청합니다. “우리와 함께 묵으시지요.”

그리고 그들과 함께 식사 자리에 앉으셨을 때 예수께서는 빵을 들어 감사기도를 드리시고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 때, 두 제자들의 눈이 열리고(31절), 그들 가운데 계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이 일은 식사 때에 발생했으며 두 제자들의 “마음을 뜨겁게 한” 성경의 열림이 있었습니다(32절). 그리고 돌이켜보니 예수님께서 길에서 그들에게 말씀하실 때 이미 발생했기에 그들은 예수님을 그들의 집으로 청했고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한 식사자리에서 그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 같은 일은 이미 앞에서 두 번이나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9장 16절, 오천명을 먹으실때에, 누가복음 22장 19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마지막 만찬을 나누실 때입니다.

그런데 “떡을 떼는” 이전의 두 사건 모두 가르침이 포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 이야기하셨고(9:11). 누가복음 특유의 장면이지만 유월절 식사 후에 다락방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22:24-38).

만약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 친교의 표시라면, 예수님께서 이 두 제자(와 그리고 24:42-43에서 다른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먹음으로써 죽음에 의해서나, 예수님과 성경, 그리고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방식에 관한 그들의 오해에 의해 단절된 친교를 회복하신 것이 되겠지요.

우리는 오늘, 누구와 함께 식사의 자리에 앉아 계신가요?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 당신 그 자체를 우리에게 떼어 주고 계십니다. 그 말씀을 받으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성례전을 통하여 교회를 세우시고 함께 모인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임재를 약속하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이 고백합니다. “그가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우리의 마음이 속에서 뜨거워지지 않았느냐?” 슬픈 표정으로 길을 떠났던 그들은 이제 다시 뜨거운 마음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Mark Allan Powell의 저서 『사랑하는 예수』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기독교는 늘 경험해야 할 하나의 실재이다. 기독교는 배우고 믿어야 할 사실이나 교리들의 집합체가 아니다”(p. 52). “중요한 것은, 우리는 예수를 단순히 존경한다는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여전히 살아 계시고 우리가 그분과 지속적이고 살아있는 관계 속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p. 53).

누가복음의 사건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경험이 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의 임재와 부재

오늘 말씀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초자연적” 현상은 예수의 사라지심입니다. 사라지시지 않았다면, 예수는 단지 길 위의 또 다른 여행자였을 것입니다.

Mark Allan Powell의 저서 『사랑하는 예수』에서 예수의 “진짜 임재”를 “우리를 놀라게 할 수 있는 하나의 실재”(p.53)라고 간단하게 진술하는데,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두 사람에게 일어난 그 일이 ‘임재’입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예수의 임재와 부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우리가 묘사한 모든 방식으로 우리와 현재 함께 계실 수 있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성서는 예수는 그가 한때 우리와 함께 계셨었지만, 더 이상은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고, 그는 장래에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지만 지금은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다고도 가르친다. 예수의 지속적인 임재를 절실하게 느낄 때에조차도 이런 “예수의 부재”를 인정하는 모호함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영성 형성의 주요한 열쇠이다. (p. 54)
누군가 내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어떤 느낌과 같습니까?”라고 물은 적이 있다. 이상한 질문처럼 보였지만 대답하려고 애를 썼다. 나는 “멀리 있는 사람과 사랑에 빠진 느낌이예요”라고 말했다. 그 대답을 들은 사람들은 “그다지 즐거울 것 같지 않은데요”라고 말했다. 그렇지 않다. 나는 그것이 즐거운 것이 될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매우 강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내와의 사랑에 빠져있다. 그녀가 멀리 있으면, 나는 그녀에 관해 계속 생각한다. 아내의 소식만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사소한 연락(편지, 전화)에도 힘을 얻는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될 때 느끼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확신에 찬 슬픔이며, 다음 몇 장에서 그 의미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여기서는 신부가 신랑을 사랑하듯이 예수를 사랑하지만, 신랑이 우리와 떨어져 있기에 우리를 슬프게 만든다는 것만을 인정하자. 사랑은 실재적이고, 강력하며 압도적일 수 있지만, 부재 또한 실재적이다. 때로 그것은 힘들기만 하다. (p. 55, 이탤릭체는 원문의 것임)

 

눈이 열려진 제자들의 즉각적인 반응은 가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예수께서 무엇을 하셨는지 전할 뿐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데려올 수 없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 앞에 예수가 나타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그들의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이 전한 내용에는 중요한 두 가지 사건이 들어 있습니다.(35절), 그 두 가지 일은 우리에게도 계속해서 일어날 수 있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1. 도상/길에서 일어난 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고, 성경, 즉 말씀을 풀어주실 때에 그들 속에서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다(32절). 그 말씀은 예수의 삶, 고난, 죽으심과 부활을 바르게 이해하는 역할을 했다.

2. 그가 떡을 뗄 때에 그들에게 알려지신 것 그들의 눈이 열리게 한 수단은 바로 식사(성찬)였다. 

“그가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우리의 마음이 속에서 뜨거워지지 않았느냐?”

이것이 우리에게 나타날 예수의 ‘임재’와 ‘부재’입니다.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에 그제서야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이것이 우리에게 나타날 예수의 ‘임재’와 ‘부재’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것을 깨닫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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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_ 찬송가 315장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주기도(새번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