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기도

경배와 찬양 _ 찬송가 21장 다 찬양하여라

신앙고백 _ 사도신경(새번역)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말씀교독 _ 교독문 137번 삼위일체

(인도자)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회중)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인도자)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회중)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6-17)
(인도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회중)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인도자)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20)
(회중)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인도자) 주도 한 분이시오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회중)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 4:4-6)

송영 _ 찬송가 3장

기도 _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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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_ 찬송가 368장 주 예수여 은혜를 내려주사

말씀 _ 요한복음 5장 1~19절,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오늘은 삼위일체주일입니다. 삼위일체는 [三位一體 , Trinity] 하나님(God)은 삼위(성부, 성자, 성령)로 존재하시되 하나의 신적 본체(本體)를 갖는다는 의미입니다. 즉, 삼위(三位)는 하나님께서 성부·성자·성령이라는 각각 구별된(내적인 관계에서의 구별성과 독자성) 세 분으로 존재하심을 보여주고, 일체(一體)는 하나님께서 세 분이심에도 동시에 동일한 한 분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한 하나님께서는 세 '위격'(位格, persona, subsistentia)으로 존재하시는데, 이 위격들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신적 본성(本性, natura)이고, 하나의 신적 본질(本質, essentia)이며, 하나의 신적 실체(實體, substantia)로서 성부, 성자, 성령은 모두가 동일한 힘과 영광을 지닌다는 기독교의 교의(敎義)이며 역사적으로는 니케아 종교회의(Nicea, A.D.325년) 때에 공인되었습니다.

삼위일체는 성경에 직접 표현된 교리는 아니지만 그 사상은 성경 여러 부분에서 나타납니다.(창1:1-3,26; 민6:24-27; 마28:18-20; 고후13:13).

하나님은 ① 유일하신 한 하나님으로서(신6:4; 사44:6; 롬3:30; 고전8:4; 갈3:20; 딤전2:5)

② 신격(Godhead)의 세 위격(Person, 창1:26; 사6:8; 마28:19; 벧전1:2; 계1:4-5)으로 존재하시며

③ 셋 모두가 하나님이시고(엡1:17·아버지가 하나님이심, 히1:8·아들이 하나님이심, 행5:3-4·성령이 하나님이심)

④ 셋 모두가 영원하시며(사9:6·아버지가 영원하심, 히1:12; 7:3·아들이 영원하심, 히9:14·성령이 영원하심)

⑤ 셋 모두가 동시에 존재하시고(마3:16-17; 요14:16-17; 엡3:16-17; 고전12:4-6; 고후13:13)

⑥ 셋 모두가 하나(상호 내재하심)이시다(사9:6; 마10:19-20; 요14:16-20; 롬8:9-12; 고전15:45; 고후3:17-18; 계5:6).

이와 같은 삼위일체 교리는 엄격한 의미에서의 절대 신비(絶對 神秘, mysterium absolutum)로서 실증적 계시와 독립해서 인지될 수 없으며, 계시된 다음에도 인간 이성(理性)에 의해 온전히 간파되거나 해석될 수 없는 기독교 신앙의 절대 신비요, 건전한 기독교 신앙으로 들어가는 가장 기본적인 신비이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28장 19절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그들을 가르치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우리가 여기에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 말씀입니다.

“나는 아버지께 구할 것이며 그는 너희에게 또다른 보혜사를 보내셔서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20절 말씀입니다.

“그 날에 너희는 내가 내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는 내 안에 있으며 또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결국 삼위일체는 하나됨 입니다. 이 신비가 우리의 삶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여기서부터 다른 삶을 꿈꾸게 되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게 되는 신비가 됩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치라는 명령의 전제, 그 날에 내가 내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는 내 안에 있으며 또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삼위일체의 신비는 어떻게 삶으로 드러나게 될까요?

오늘 삼위일체주일의 본문말씀은 요한복음 16장 12~15절입니다. 다같이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12.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13.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15.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

 

요한복음 16장 12~15절에 등장하는 아버지와 진리의 성령, 예수님과의 관계가 바로 삼위일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저는 요한복음 5장을 또다른 본문 말씀으로 선택하였습니다.

요한복음 5장 1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유대인들의 명절이 되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의 문 근처에는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고 불리는 못이 있었는데 이 못에는 다섯 개의 기둥으로 둘러싼 행각이 있었다. 그 행각 안에는 수많은 병자들, 곧 눈먼 사람, 다리 저는 사람, 팔 다리가 마비된 병자들이 누워있었다.”

요한복음 5장의 말씀은 베데스다라는 연못에 살고 있던 38년된 병자의 이야기입니다.

베데스다(Bethesda)는 아람어 ‘베트 헤스다’의 헬라어 음역으로 ‘자비(은혜)의 집’이란 뜻입니다. 예루살렘 동북쪽 양의 문(베냐민 문) 곁에 있던 연못이라고 전해지고 있는데요. 우리의 상상과는 조금 다른 연못으로 추정됩니다. 이 인공적인 연못 주변에 헤롯 대왕은 5개의 행각을 세웠는데요. 연못은 주기적으로 물이 그쳤다 이어졌다 하는 간헐천(間歇泉)으로, 못의 물이 끓어오른 뒤 제일 먼저 들어가는 자는 병을 고친다는 전설이 예수님의 시대까지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양의 문은 느헤미야 때 대제사장 엘리아십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성전으로 들어가는 제물, 즉 양이 들어가는 문을 말하고 있습니다.

연못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살펴보면 고대부터 키드론 계곡에서 흘러온 빗물을 모아 성전에 물을 공급하는 역할을 했으며, 직사각형의 형태로 깊이가 20m 정도 되었고, 면적은 120m x 60m 정도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연못 주변에는 의학적∙종교적 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건물들이 세워졌고 특히 연못 동쪽에는 BC150년경부터 AD70년경까지 욕실과 병실 등이 지어져 대중들을 위한 치료소로 활용되었다고 합니다. 요한복음에는 모두 다섯 개의 회랑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으로 향하시던 예수님은 이 연못 가에서 한 남자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십니다.

예루살렘 양의 문 곁에 베데스다 연못 가엔 그 남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요한은 연못 주변으로 5개의 행각이 있었으며 그 안에 병자, 맹인, 다리를 저는 사람, 혈기가 마른 사람들이 누워있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천사가 내려와 물이 움직이길 기다렸고 움직이는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이든지 낫게 되었으며, 그래서 그들은 연못 주변 행각을 집으로 삼아 살아가고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병자들로 가득한 연못 주변, 그 곳에 예수님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한 남자가 누워있습니다.

왜 그 남자에게 다가가셨을까요?

요한은 예수님께서 그가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것을 아셨기” 때문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 많은 병자들 사이에서도 너무도 야위고 지친 한 남자, 그의 눈동자를 그려봅니다. 어떠한 눈빛이었을까요? 그의 공허한 눈빛과 동시에 간절함과 체념이 섞인 점점 생기를 잃어가는 그의 슬픈 눈빛을 그려봅니다. 그의 앞에 예수님이 서 계십니다. 그는 예수님을 알아보기는 했을까요?

예수님께서 그 남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그 남자가 대답합니다. “물이 움직일 때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동안에 이미 다른 이들이 먼저 내려갑니다.”

처음 그가 이 베데스다 연못에 도착했을 때에는 아마도 그의 곁에도 그를 도와줄 사람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연못의 기적은 가장 먼저 물에 들어가는 사람에게만 허락되었고 수많은 병자들 사이에 가장 먼저라는 말에 해당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같은 시각에 모든 병자들이 연못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를 도우려했던 이들도 안간힘을 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남자는 걸을 수 없는 사람이었고 그 무거운 몸을 이고 연못에 가장 먼저 도착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그 남자의 38년의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아마도 그 남자도 어느 날부터는 그 연못을 떠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를 다른 곳으로 옮겨줄 사람조차 없어진 아픈 세월이 그렇게 흘러갔습니다.

그런 그 남자의 대답에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그렇게 그는 일어나 걸어갑니다. 그 엄청난 38년의 세월을 생각해보면 그 순간은 그저, 찰나일뿐입니다. 이렇게나 빨리 일어날 수 있음에 그 남자도 놀랐을 것입니다. 이렇게 걷게 되는 세월이 38년이었다니 그 남자의 감정을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 놀라운 기적, 한 남자가 다시 태어난 그날의 이야기는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하필, 그날이 안식일이었던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안식일에 사람을 위하여 일을 하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은 그러한 거룩한 날입니다.

그 안식일에 누워있던 한 남자가 일어나 걸어 그의 자리를 떠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 남자는 38년동안 내가 보았던 그 남자, 걸을 수 없는 그 남자가 일어나 38년 된 그의 자리를 떠나려고 합니다.

“도대체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한 사람이 누구냐?”

그 때 그는 예수님의 이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후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나 그 남자는 그제서야 예수님의 이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신을 고친 이가 예수님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그날의 놀라운 기적은 논란과 분노의 이야기로 전복됩니다.

16절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일을 안식일에 행하셨다고 해서 유대인들은 그를 박해하였다.
17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지금도 항상 일하고 계시며 나도 일하고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18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더욱 더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다. 왜냐하면 그가 안식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자기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삼위일체의 논쟁이 일어날 수 있는 부분이지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삼위일체’라는 우리의 고백은 그리 쉽게 이루어 진 것이 아닙니다.

계속 말씀을 살펴보면 요한복음 5장 16절부터 47절까지는 유대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들었다는 너희 속에 그 말씀이 거하지 아니한다. (38절)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한다. (40절)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다. (42절)

 

왜 유대인들은 그 베데스다 연못의 그 남자가 일어나 걸어가는 것을 보지 못하였을까요? 아니 분명 그 남자가 걸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안식일을 먼저 생각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다만 그들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42절)

그것은 그들이 진정으로 생명을 얻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40절)

그것은 말씀을 들었으나 그들 속에 말씀이 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8절)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너희가 나에게 와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냐?”

38년 베데스다 연못에 누워있던 그 남자가 걸어가는 모습을 진정한 기쁨으로 바라 볼 수 있다면 그것이 아마도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 남자가 일어서는 순간, 왈칵 눈물을 쏟는다면 아마도 진정으로 영생을 얻기를 원하여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마음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남자가 다시 삶의 첫발을 내딛는 모습에 감격한다면 아마도 말씀이 우리 안에 함께 살아있다는 것일 것입니다.

이것이 삼위일체의 비밀이요. 삼위일체의 신비가 우리의 삶으로 드러나는 비결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면 이것이 삼위일체의 신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삼위일체, 성부와 성자, 성령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예수님은 4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지만 너희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는 그를 받아들일 것이다.”

이 말씀에 비추어보면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되는 것인 것 같습니다. 내 이름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되는 삶을 소망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19절의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무슨 일을 하시든지 아들도 똑같이 하기 때문이다.” 아멘.

 삼위일체주일, 신비로 가득한 삶이 되시길 다시 한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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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_ 찬송가 428장 내 영혼에 햇빛 비치니

주기도(새번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