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기도
경배와 찬양 _ 찬송가 9장 하늘에 가득 찬 영광의 하나님
신앙고백 _ 사도신경(새번역)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교독문 _ 47번 시편 105편
(인도자) 여호와께 감사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하는 일을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
(회중)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며 그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말할지어다
(인도자)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은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회중) 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의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
(인도자) 그의 종 아브라함의 후손 곧 택하신 야곱의 자손 너희는 그가 행하신 기적과 그의 이적과 그의 입의 판단을 기억할지어다
(회중) 그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라 그의 판단이 온 땅에 있도다
(인도자) 그는 그의 언약 곧 천 대에 걸쳐 명령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셨으니
(회중) 이것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고 이삭에게 하신 맹세이며
(인도자) 야곱에게 세우신 율례 곧 이스라엘에게 하신 영원한 언약이라
(회중) 이르시기를 내가 가나안 땅을 네게 주어 너희에게 할당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도다(1-11)
송영 _ 찬송가 2장 찬양 성부 성자 성령
기도 _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찬양 _ 찬송가 88장 내 진정 사모하는
봉헌 _ 마음을 다하여
말씀 _ 요한복음 10장 선한목자 11~17절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교회의 이미지, 즉 교회 건물에 가장 많이 그려지는 그림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바로 아래의 그림입니다. 교회 건물 밖에서 교회 입구에도 가장 많이 그려지는 그림이 선한목자, 예수님의 그림입니다.

사실, 목자라는 개념이 우리에겐 낯설기도 할 텐데요. (목자를 보기가 쉽지 않은 현대사회입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대표적인 이미지가 선한목자, 예수님의 그림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요한복음에는 ‘나는’으로 시작되는 예수님의 말씀이 요한의 신학이요. 요한복음서만의 아름다운 형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온 생명의 빵이다. (요6:5)
나는 선한목자다. (요10:11)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요14:6)
나는 참포도나무다. (요15:1)
예수님은 우리에게 당신이 누구신지 스스로 알리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눅9:20)
우리는 지금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고백하고 있을까요?
기독교는 ‘고백’의 종교입니다. 그 어떤 종교에서도 ‘고백’이 강조되지 않습니다. 불교의 수행은 ‘고백’과 다른 의미요. 길입니다. 힌두교의 수많은 신들은 ‘고백’과는 관계없이 ‘신’의 존재를 드러냅니다. 이슬람교의 ‘알라’는 거역할 수 없는 위엄으로 복종과 경배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우리의 고백이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게 할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우리의 고백이 우리를 그의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우리의 고백에 앞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당신이 누구신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선한목자다. 길이다. 진리이다. 생명이다. 참포도나무이다."
이제 우리는 그분의 말씀에 따라 고백하길 소망합니다.
네, 주님은 우리의 생명입니다.
네, 주님은 우리의 길입니다.
네, 주님은 우리의 진리입니다.
네, 주님은 우리의 참포도나무입니다.
네, 주님은 우리의 선한목자입니다.
선한목자, 예수님의 이미지가 교회의 대표적인 이유는 아마도 ‘관계’를 통해 그 의미가 확대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포도나무와 가지 또한 ‘관계’라는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지만, 이는 ‘목자’와 ‘양’의 관계에서 보여주는 역동성을 드러낼 수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포도가지는 포도나무를 떠나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또한 포도가지는 포도나무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선한 목자[善, the good shepherd]는 요한복음 10장 11절에서 ‘양’을 위하여 목슴을 버린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포도나무는 포도가지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비유가 참으로 우리를 깊은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것 같습니다.
‘선한목자’의 이미지는 구약성경을 통하여 전승되어 왔습니다. 너무도 널리 알려진 말씀,
바로, 시편 23편의 말씀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다윗 왕의 기도는 하나님을 ‘목자’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이라면 모를 수 없는 이 다윗의 고백을 통하여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자신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나를 인도하고 도우시고 보살피시는 ‘목자’ 하나님이 계시니 나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신 ‘선한목자’는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는 ‘목자’를 넘어섭니다. ‘선한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립니다. ‘선한목자’는 사나운 이리가 오늘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립니다.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결코 의지로 되는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말 그대로 잘 살기 위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선한목자’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계십니다.
내가 내 양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내 양이 나를 알기 때문이다.
이는 아버지가 나를 아시고 또한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내가 ‘목숨’을 버리는 것은 다시 ‘얻기’ 위함이다.
무엇보다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며 그러하기에 내가 내 양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선한목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푸른초장, 쉴만한 물가, 아름다운 푸른 초원의 예수님과 양 떼의 그림은 단순히 ‘목자’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숨겨진 의미는 ‘목숨’을 버린 ‘십자가의 예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선한목자’가 예수님이시니 우리는 그분의 ‘양’입니다.
‘양’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양들은 낯선 사람들은 결코 따라가지 않으며 오히려 피해갈 것인데 왜냐하면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요10:5)
‘양’은 목자를 알고, 목자의 목소리를 듣고 그의 양떼가 됩니다. 그래서 목자의 ‘양’들은 양떼에 속하여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목자는 자신의 ‘양’을 알고 ‘양’들은 목자를 따라갑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양’떼가 되어 그분을 따라가길 기도합니다.
‘양’에 관한 또 다른 성경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마지막 21장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요21:15)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또다시 제자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흩어져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다시 고기잡이 배에서 고기를 잡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다시 찾아오십니다. 그들을 위해 아침을 준비하시고 아침을 먹은 후 예수님은 제자,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자 예수님이 다시 말씀하십니다.
“내 어린 양들을 먹이라.”
이렇게 예수님과 베드로는 꼭 3번을 말씀을 나눕니다.
"내 어린 양들을 먹이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먹이라."
베드로는 초대교회,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그의 이름은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대로 이루져 반석(베드로) 위에 교회가 세워집니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
이렇게 세워진 교회는 이제 베드로에게 아니 교회에게 말씀하신 목소리를 들어야만 합니다.
“내 양을 먹이라. 돌보아라.”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그대로 향하는 교회가 진정한 교회입니다. '말씀'으로 먹이고 돌보는 교회입니다. 이제 ‘양’들의 무리가 성도입니다. 예수님은 내‘양’을 알고계신다고 요한복음은 분명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니고데모를 알고 계셨듯이 이미 우리를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래서 교회는 양떼를 위한 ‘푸른 초장이요, 쉴만한 물가’가 됩니다.
양떼가 머무르는 곳, 머물러야하는 곳, 그래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곳, ‘푸른 초장’입니다.
푸른초장, 쉴만한 물가를 찾고 계신가요? 오늘 ‘교회’가 우리 모두의 푸른초장, 쉴만한 물가가 되기를 전심으로 기도합니다.
찬양 _ 찬송가 569장 선한 목자되신 우리 주
주기도문(새번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