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기도
경배와 찬양 _ 찬송가 22장 만유의 주 앞에
사도신경(새번역)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말씀교독 _ 교독문 61번 시편 142편
(인도자)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회중)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인도자) 내가 내 원통함을 그의 앞에 토로하며
(회중) 내 우환을 그의 앞에 진술하는도다
(인도자) 내 영이 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
(회중) 내가 가는 길에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올무를 숨겼나이다
(인도자)오른쪽을 살펴보소서 나를 아는 이도 없고 나의 파난처도 없고
(회중) 내 영혼을 돌보는 이도 없나이다
(인도자)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회중) 주는 나의 피난처시오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인도자)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나는 심히 비천하니이다
(회중) 나를 핍박하는 자들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그들은 나보다 강하니이다
(인도자)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하게 하소서
(회중) 주께서 나에게 갚아 주시리니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1-7)
송영 _ 찬송가 3장 성부 성자 성령
기도 _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찬양 _ 찬송가 321장 날 대속하신 예수께
말씀 _ 요한복음 10장 11~18절
요한복음 5:1-10:42은 유대인의 주요한 축제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Brown(John, The Anchor Bible)은 이 부분에 대해 다음과 같은 개요를 제공합니다.
∙ 안식일의 예수(5:1-47)
∙ 유월절의 예수(6:1-71)
∙ 장막절의 예수((7:1-8:59)
∙ 장막절이 끝난 후(9:1-10:21)
∙ 수전절의 예수(10:22-39)
절기와 상관없이 예수를 상상할 수 없습니다. 이는 시간과 우리들의 관계이기도 합니다. 시간이 없다면, 의미가 있을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우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우리는 시간과 공간, 우리 주변을 잘 살펴보아야 비로서 의미가 생긴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실, 예수의 말씀은 언제나 당신과 제자들 가까이 있는 것으로 ‘말씀’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렇게 오늘 예수는 요한복음 10장에서 당신을 ‘선한목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선한 목자”(ho poimen ho kalos)라고 부르신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Craig Koester는 그의 책 『Symbolism in the Fourth Gospel』에서 목자(=poimen)하면 연상되는 몇 가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가장 광범위한 수준은 생활 경험이었다. 목자는 1세기의 헬라어를 말하는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이 단어는 독자들에게, 양 떼나 염소 떼를 초장으로 인도할 때 한 손에 지팡이를 들고, 손으로 짠 옷을 입고 햇볕에 그을린 얼굴을 가진 사람을 떠올리게 할 것이다.
둘째, 독자의 특별한 인종적 종교적 유산에 따라 다른 연상을 할 수 있다. 유대의 성서에 따르면, 이스라엘 역사에서 지도자들 중에 몇몇은 목자들이었다. 하나님은 양들을 돌보고 있는 모세에게 나타나셨다.(출애굽기 3:1-6). 다윗은 약탈자에게서 그의 양 떼를 지키면서, 전쟁 기술을 배웠다(삼상 17:34-35). 목자라는 용어는 또한 성서의 저작들과 외경들에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미래의 다윗 왕, 심지어 하나님을 뜻하는 용어로 은유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리스-로마 세계의 교육을 주도하였던 고전헬라어에서, 이 용어는 아가멤논 왕(Agamemnon the king)같은 지도자들을 칭하는 은유로 사용된다. 철학자들과 연설가들은 종종 사람들을 다스리는 기술을 목양의 기술과 비교했다.
여러분은 ‘목자’하면 어떤 연상을 떠올리시나요? 긍정적인 이미지? 부정적인 이미지?
그래서 예수는 ‘선한목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선한”을 뜻하는 단어는 kalos입니다. kalos는 도덕적으로 옳은 것, 더 가치 있는 것을 약간 더 강조하는 단어이며 “모범적인” 또는 “진실한” 또는 “정직한”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단어는 요한복음에서 7회 나오며, 10장에서 5회 등장합니다.
• “선한”목자(10:11, 11, 14)는 삯꾼 목자와 대조된다.
• “선한” 일(10:32, 33)은 아마도 말만 하는 것과 대조될 것이다.
• 그리고 2:10에서 2회 -“좋은” 포도주는 낮은 품질의 포도주와 대조된다.
그리고 요한은 예수를 “선한 목자”로 만드는 것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1) 그는 양들을 위해 스스로 생명을 버린다(11,14,17,18절)
(2) 그는 양들을 돌본다(또는 걱정한다, melei)(13절)- 그는 삯군과 같지 않고,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이 없고 도둑이었던 유다와도 같지 않다(12:6, 요한복음에서 이 단의 유일한 다른 용법이다).
(3)그는 자신의 양들을 알고, (그리고 양들은 그를 안다)(14절). ginoskos는 “지적으로 알다”는 인지적 용어인 동시에 “그 사람을 알다” “∼와 친숙하다,” “∼와 밀접한 관계를 갖다,” 등 다양한 범위의 인간관계를 뜻할 수 있는 관계를 나타내는 용어입니다. 즉, 이 절은 예수께서 그의 양들과 맺는 관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것은 예수가 하나님 아버지와 갖는 관계와 동일하다. (15절).
신약성서에서 lukas, 즉 “이리”라는 단어가 사용될 때마다 양이나 어린 양의 반대개념으로 등장합니다. 마태복음 7장15절에서 이리들은 (양의 옷을 입은) 거짓 선지자들이고, 사도행전 20장29절도 비슷한 의미로 등장합니다. 그들은 공동체의 일원이지만 진리를 왜곡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0장 16절과 누가복음 10장 3절에서 예수는 제자들을 이리 가운데 있는 양들로 파송을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구절들에서 “이리들”은 믿지 않고 신자들에게 적대적인 사람들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이리들”은 양 떼와 상관이 없거나 양떼의 일원으로 보이는 양떼의 적들이며 그들은 속임수나 직접적인 물리적 공격을 통해 신자들의 믿음을 파괴하거나 왜곡하고자 합니다.
이 이리들과 함께 등장하는 것이 삯꾼입니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들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나 버린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가고 양 떼를 흩어버린다.”
“삯꾼들”(misthotos)은 일을 하고 대가를 받는(misthos)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삯꾼과 목자의 차이는 ‘대가를 받고 안받고’ 즉 금전적인 데 있을까요?
목자는 양떼의 소유자입니다. 삯꾼과 목자의 차이는 양떼들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양 떼는 목자의 것이지만, 삯꾼의 것은 아닙니다. 목자는 양 떼가 분리되지 않게 하기 위해 목숨을 버릴 정도로 양 떼를 돌보지만, 삯꾼은 위험을 피해 도망가지요.
그래서 예수는 선한 목자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선한 목자는 양과 목자의 “관계”에 있습니다.
요한복음 10:1-39절의 더 넓은 “목자” 맥락을 살펴볼 때, 양 떼를 보호할 때의 선한 목자의 역할의 일부는 경계의 제공입니다. 거기에는 보호를 해줄 양의 우리가 있습니다. 목자는 개들을 사용해서 양들이 하나의 무리로 모여 있게 할 것입니다.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양들은 이리에게 잡아먹힐 위험이 있기 때문이지요.
동사 “congregate”에서 파생한 “회중”을 뜻하는 명사 “congregation”은 “함께”라는 뜻의 라틴어 “com”과 :“모이다”는 뜻의 라틴어 “gregare”의 합성어입니다. 보통 영양분을 제공하고 보호하기 위해 양떼를 함께 모이게 하는 것은 선한 목자의 핵심적인 면입니다.
“함께 모이는 것이 없이”, 즉, “양 떼”와 관계를 맺지 않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앙생활이 가능할까요?
4절 말씀입니다. 자기 양들을 모두 다 불러낸 다음 목자는 앞장서서 가고 양들은 뒤따라간다. 왜냐하면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14절 말씀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를 위하여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그는 세상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는 구원자입니다. 그런데 오늘 요한복음에서 그는 우리에게 선한 목자로 다가오십니다. 이 선한 목자는 오직 그의 양 일 때 가능합니다.
그는 자신의 양들을 알고, 그리고 양들은 그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알고 있을까요? 여기서 안다는 단어는 앞서 말씀드렸듯이 “지적으로 알다”라는 인지적 용어인 동시에 “그 사람을 알다” “∼와 친숙하다,” “∼와 밀접한 관계를 갖다,” 등 다양한 범위의 인간관계를 뜻할 수 있는 관계를 나타내는 용어입니다.
예수와 관계가 있을 때, 그의 양이라고 우리가 받아들일 때 그는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십니다.
16절은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양들을 위한) 우리로부터 오지 않은 다른 양들이 있는데, 내가 그들을 인도하여 그들이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저와 여러분이 우리 안에 있는 양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10절 말씀에서 예수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하셨습니다. 양들은 풍성한 삶은 푸른 초장위에서 눕고 먹고, 잔잔한 물을 마시고, 많은 굶주린 약탈자에게서 보호받는 것의 범위를 넘어서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의 풍성한 삶은 좀 더 복잡하지요.
우리에게도 먹고 마시고 편안한 잠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넘어 우리의 풍성한 삶을 위해서는 우리가 사랑받고 있으며, 가치 있는 사람들임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풍성한 삶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들, 즉 우리의 소유와 관련이 있다기보다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특히 하나님과 경험하는 사랑의 관계와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는 당신이 선한 목자요.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고 하셨습니다.
선한 목자의 양들은 낯선 사람을 결코 따라가지 않으며 오히려 피하고 “우리 안”에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우리 안에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찬양 _ 찬송가 302장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주기도(새번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