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기도
경배와 찬양 _ 찬송가 9장 하늘에 가득 찬 영광의 하나님
신앙고백 _ 사도신경(새번역)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교독문 _ 45번 시편 108편
(인도자)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회중)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
(인도자)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회중)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인도자) 여호와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회중)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양하오리니
(인도자)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보다 높으시며
(회중) 주의 진실은 궁창에까지 이르나이다
(인도자)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회중) 주의 영광이 온 땅에서 높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
(다같이)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을 건지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응답하사 오른손으로 구원하소서(1-6)
송영 _ 찬송가 2장 찬양 성부 성자 성령
기도 _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찬양 _ 찬송가 434장 귀하신 친구 내게 계시니
봉헌 _ 마음을 다하여
말씀 _ 요한복음 13장 34~35절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황금률[golden rule, 黃金律]을 알고 계실까요?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요즘 말로 “절대비법”인 황금률은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 17세기부터 널리 사용된 표현이라고 전해집니다. 그리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황금률’은 말 그대로 황금처럼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룰(rule), 진리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 황금률은 성경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마태복음 7장 12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누가복음 6장 31절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에게 대접하라"의 예수님의 가르침을 ‘황금률’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말씀이 우리의 종교, 기독교 윤리의 기본원리가 됩니다. 기독교 윤리관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 말, “받고자하는 대로 대접하라.”입니다.
성경은 정말 많은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적용되는 ‘황금률’을 찾았을까요? 그리고 그 말씀을 우리 삶의 기본원리로 삼아 살아가고 있을까요? 무엇이 우리의 삶의 ‘황금률’일까요?
우리 삶의 절대비법, ‘황금률’을 발견하시는 오늘 주일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요한복음 13장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날 밤의 사건을 전하고 있습니다. 내일,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내일이면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전날 밤, 예수님은 사랑하는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모이셨습니다. 모두 다 함께말입니다.
이 자리에서 우리는 드디어 예수님의 모든 제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시몬 베드로,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안드레, 빌립, 바돌로매, 마태, 도마,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다대오, 가나안 사람 시몬, 가룟 유다 12명이 모여 예수님과 저녁식사를 함께합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레오나르 다빈치의 그림, 최후의 만찬입니다.

모두 함께한 저녁식사가 얼마나 즐거웠을까요? 또 이렇게 모인 이 밤, 궁금증이 더해지기도 하였겠지요?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제자들도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으려는 소문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날 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사랑하라. (요13:34)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그것으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요13:35)
계명(誡命, commandment)은 하나님의 명령이요. 하나님이 위임하신 사명으로 마땅히 행하도록 위탁받은 명령이나 책무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율법과 십계명’이 계명입니다.
이 계명을 예수님께서 다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 분명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새 계명이다. 율법과 십계명을 넘어서는 새 계명을 너희에게 준다."
그래서 유대교가 율법과 십계명의 종교라면 이 계명 때문에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가 됩니다.
철학자 헤겔은 계명을 ‘절대적인 힘으로서 주인인 신과 그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노예로서의 인간이라는 지배관계에서는 계명이 주어지며 그에 대한 복종이 요구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명령된 복종은 기쁨도 즐거움도 사랑도 없는 것이며, 그 계명은 필연적으로 외적인 질서에 속하게 되는데 이와 같은 유대교의 계명에 대해 예수님은 그것과는 전혀 이질적이고 생명의 충실에서 생겨나는 주체적인 사랑을 대치시켜 모든 의무 관념이 소실되는 '사랑'의 관계로 변화시키셨다는 것입니다.
의무를 넘어선 사랑의 관계, 새 계명의 참된 의미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말할 때, 그 사랑에 대해 망설이게 됩니다.
그 사랑을 알게 되면 머뭇거리게 됩니다. 과연 사랑할 수 있을까?
---------------------------------— 사랑하다 죽어버려라 -정호승-
사람들은 사랑을 모른다/ 자기 맘대로 사랑하고 / 사랑한다고 말을 한다
너는 어찌되었던지/ 나만 사랑하고 /사랑한다고 말을 한다
너는 무엇을 원하는지 / 너는 무엇이 되고 싶은지 / 물어보지도 않는다
그저 내가 원하는 것만 / 내 마음대로 네가 되는 것을 /사랑이라고 말한다
사랑하다가 죽어야 하는데 / 너를 사랑하기 위해/ 내가 죽어야하는 것이
사랑인 것을 알지 못한다 / 나를 살리는 것은 / 사랑이 아닌 것을 알지 못한다
너를 살리는 것이 / 사랑인 것을 알지 못한다 /
그러므로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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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을 썼다 지웠다를 계속한 정호승 시인의 ‘시’입니다. 몇 번을 썼다 지웠다를 반복한 이유는 바로 제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 않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지 못하는 제 자신의 모습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이야기 하지만 그 ‘사랑’이 참으로 공허해지는 것 같아 ‘서로 사랑하라’라는 말을 머뭇거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과연 우리는 사랑하며 살 수 있을까요?
4복음서에 모두 기록된 최후의 만찬에서 요한복음에서만 전하고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20절 말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 말씀을 하시기 전 예수님은 식사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더니 대야에 물을 담아 식탁에 앉아 있는 제자들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곤 한 사람, 한 사람의 발을 씻어주십니다.

사랑하라, 이렇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당신이 먼저 보여주셨습니다. 혹시나 ‘사랑’이 무엇인지? 물어볼 제자들에게 ‘사랑은 이런 거란다.’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결코 나와 함께 할 수 없다.” (요13:8)
발을 씻는다는 의미는 더러움을 씻는다는 의미이며 곧 죄를 씻는다는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사랑과 동시에 ‘용서’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잘 살펴보면 우리가 그 어려운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을 해낼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하며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용서’하며 살아간다는 것이지요. 거창하고 위대한 사랑만 떠올리지 않아도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은 사랑하는 제자들,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 매일 저녁을 함께 먹는 사람들을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매주, 매일 반복하는 기도와 같이 ‘용서’하며 살아가는 것이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고 계심”을 아는 것입니다. 사랑하며 살아가기를 애쓰기보다는 먼저 기억해야하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받는 존재임을 아는 것입니다. 헤겔의 말처럼 의무적인 계명을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관계 안으로 우리를 초대하신 것이지요. 사랑은 결코 의무적인 행동으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정호승 시인의 말처럼 자기 맘대로 사랑하고 사랑한다고 말을 하는 것은 사랑을 모르는 것입니다.
사랑은 나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적어도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니까요.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언젠가는 사랑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자연스런 이치이겠지요. 나무에 꽃이 피기 시작하면 열매를 맺는 날이 기다려지는 것처럼요. 사랑으로 꽃이 피면 사랑의 열매를 맺는 날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그 날이 ‘소망’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그것으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요13:35)
찬양 _ 찬송가 442장 저 장미꽃 위에 이슬
주기도문(새번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