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기도
경배와 찬양 _ 찬송가 10장 전능왕 오셔서
신앙고백 _ 사도신경(새번역)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교독문 _ 33번 시편 72편
(인도자)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회중) 그가 주의 백성을 공의로 재판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정의로 재판하리니
(인도자) 의로 말미암아 신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
(회중) 그가 가난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
(인도자) 그들이 해가 있을 동안에도 주를 두려워하며 달이 있을 동안에도 대대로 그리하리로다
(회중) 그는 벤 풀 위에 내리는 비같이, 땅을 적시는 소낙비같이 내리리니
(인도자) 그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
(회중) 그가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강에서부터 땅 끝까지 다스리리니(1-8)
(다같이) 모든 왕이 그의 앞에 부복하며 모든 민족이 다 그를 섬기리로다(11)
송영 _ 찬송가 3장 성부 성자와 성령
기도 _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찬양 _ 찬송가 86장 내가 늘 의지하는 예수
봉헌 _ 마음을 다하여
말씀 _ 요한복음 16장 23~33절
오늘의 말씀은 요한복음 16장입니다.
13장에서부터 시작된 목요일의 이야기는 이제 정점을 향하고 있습니다.
목요일 늦은 밤, 예수님과 제자들은 성찬과 세족식이 이루어진 마가의 집을 떠나 길 위에 계십니다. 그 길 위에 예수님의 말씀이 새겨집니다. 요한복음 15장부터 17장까지 그 장소를 우리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흔히, 예수님의 기도를 겟세마네의 기도라고 알고 있지만 17장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장소가 겟세마네라고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18장 1절에 “예수님께서 이 말씀(기도)을 하신 뒤에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골짜기 건너편으로 떠나 가셨다. 거기에는 동산이 있었는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그곳으로 들어갔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가룟유다와 로마군인들과 유대인의 하인들에 의해 잡히시고 마지막 고난의 여정이 시작됩니다.

왜? 그 밤, 길 위에 계셨을까?
문득 이런 생각이 깊어졌습니다. 마지막 날, 그 날, 그 시간이 가까이 올 줄 알고 계셨을텐데 왜? 그 밤, 길 위에 계셨을까?
예루살렘의 그 밤, 그 길은 등불로 밝았을까요? 춥지는 않았을까요?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밤, 그 까만 밤에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고 있었을까요?
목요일 밤, 길 위에 계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닥칠 고난을 미리 알려주신 것은 아닐까요? 길 위에 살아야만 한다는 것을 그 밤에 알려주신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끊임없이 머물고 싶어하지만, 인생이란 길 위에 있음을 알려주신 것이 아닐까요? 이 땅에 머물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알려주신 것은 아닐까요?
그 길은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으셨던 것은 아닐까요?
“나는 아버지께로부터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간다.” 요한복음 16장 28절 말씀입니다. 길 위에 계신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간다고 말씀하십니다. 길 위에 계시니 이미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로 가고 계신 것을 제자들은 알수 있었을 것이고, 가슴 깊이 새겨졌을 것입니다. 길 위에 예수님의 말씀이 새겨지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다시 그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그 밤을 기억하고 있었다면 그 길 위에서 예수님의 말씀 또한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나는 혼자가 아니다.” 길 위에 서 있는 우리는 모두 혼자가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함께하시고 또한 예수님께서 그 길에 말씀을 새기셨습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까만 밤, 길 위에 서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함께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고 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사회적거리두기 4단계 연장이 결정되며 교회는 또 고민이 깊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자료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코로나19 사태 이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 후 교인들은 매주 교회에 나오려고 할까? 교회의 위기는 어디서 온 것일까?
그런 자료들 가운데 교회의 기복 신앙을 문제로 여기는 자료가 많았습니다.
기복 신앙 [ 祈福 信仰 , faith for blessing ] : 복을 기원함을 목적으로 믿는 신앙. 즉, 신앙 대상인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추구하는 것보다 자신의 형통과 소원 성취와 입신양명(立身揚名), 무병장수와 자손 번영 등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는 초보적이고 현세적(現世的)인 신앙 행태를 말한다.
한국기독교의 역사에서 서정민 교수는 다음과 같이 한국교회의 기복신앙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 입문의 동기가 현세적 이익, 눈앞의 유리함에 있을 때 이러한 신앙인을 '라이스 크리스천(rice Christian)'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대개 '교회' 혹은 '기독교 신앙'이 과연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에 관심을 두는 신앙형태로 결코 성숙된 기독교 신앙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런데 바로 한국전쟁 이후 광범위하게 확산된 한국교회의 신앙양태 속에서 이러한 특징을 다수 발견할 수 있다.
이를 좀더 신학적으로 발전시켜 말하면, '축복중심의 신앙'으로까지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기복신앙'이라고도 이르는 '현세중심'의 신앙이 강화된 것이 이 시기인데, 분석해 보자면 생명과 재산에 대한 위협이 컸던, 그리고 갑작스러운 사회변동으로 불안과 소외를 심하게 경험했던 이들에게 심화되었던 신앙양태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기독교의 균형적인 신앙형태로는 볼 수 없다. 첫 단계로 교회에 나가 기독교인으로 멤버십을 가지면, 구제와 배급, 원조의 시혜에서 유리해질 수 있는 가능성에 관심을 갖게 되고, 이어 기도와 은혜의 산물이 물질적 축복이나 난관의 타개, 신유와 치병에 중점을 두는 신앙으로 이행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기독교의 '십자가적 헌신' '희생' '역사에의 예언' 같은 항목이 간과되기 십상이다.
이러한 전체적 분위기 속에서 또 다른 부작용이 나타나는데, 오도된 신앙, 일정한 개인에 의지한 카리스마 등으로 생겨난 사이비 이단 종파들의 출현이었다.
기복신앙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교회와 하나되어 교회 안의 사람들에겐 축복의 간증이 되어버렸고 교회 밖의 사람들에겐 비난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한국교회가 모두 기복신앙뿐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는 생명이 넘치는 놀라운 진리로 가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기복신앙이라는 설명하기 어려운 신앙의 형태로 말미암아 우리 스스로 문제를 안고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교회가 기복신앙으로 규정되어지고 점차 이러한 인식이 확산되어 가면서 세상 사람들은 너무도 쉽게 교회와 교인들을 비난할 수 있게 되었지요. 그러나 정작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6장 전체 말씀은 23절 말씀을 통해 중심을 잡을 수 있습니다.
“너희가 아버지께 무엇이든지 구하면 아버지께서 내 아름으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구하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한국교회는 기복신앙으로 변질되어 온 것은 아닐까요?
“구하라 주실 것이요”
마태복음 7장 7~8절 말씀입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마가복음 11장 24절과 마태복음 21장 22절 말씀은 같은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구하라! 이 말씀을 우리는 우리 생각대로 오해하고 적용하면서 ‘기복신앙’으로 서서히 변질 시킨 것은 아닐까요?
“구하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16장 전체의 중심이며 동시에 왜 구해야하는지, 무엇을 구해야하는지, 어떻게 구해야 하는지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구하라”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너희가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요16:1) 사람들이 제자들을 회당에서 쫓아낼 때,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회당에서 쫓아낼 때, 예수님의 제자들과 우리를 죽이려고 할 때 넘어지지 않기 위해 구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진리의 성령께서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에로 인도하실 것이니”(요16:13) 구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보게 될 것이니”(요16:16) 구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울며 통곡할 때, 세상이 우는 너희를 보며 기뻐할 때”(요16:20) 구하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슬픔은 기쁨으로 변하게 될 것이니 구하라!는 것입니다.
“너희의 기쁨을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요16:22) 구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믿었으므로”(요16:27) 믿음으로 구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오직 예수님을 사랑하고 믿음으로 어떻게 구해야하는지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너희 안에 “평화”를 구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때에 “용기”를 구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구하는 것은 모두 너희에게 줄 것이니 예수님은 “세상을 이기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을 이기기” 위하여 구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구하라!라는 말씀을 기복신앙과 혼동된다는 핑계를 그만두고 이제, 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요한복음 16장의 구하라!라는 말은 영어로 ask입니다. “요청하다”라는 의미이지요. 그런데 우리말 구하라!는 영어로 Save!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구원하라”라는 의미이지요.
우리가 구하는 것은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구하라! SAVE!
구해주십시오! Save the Earth! Save the People! Save the Afghanistan! Save the Myanmar!
성령이 하십니다. 나의 능력이 아니어도 성령이 그 일을 능히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니 구하십시오.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가 구할 것을 우리에게 알게하시고 느끼게 하실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평화를 구하는 이, 그리스도인, 우리이길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용기를 구하는 이, 그리스도인, 우리이길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자유를 구하는 이, 그리스도인, 우리이길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구하라! 그러면 받을 것이며 너희 기쁨이 충만해 질 것이다.”
찬양 _ 찬송가 93장 예수는 나의 힘이요
주기도문(새번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