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기도
경배찬양 _ 찬송가 10장 전능왕 오셔서
신앙고백 _ 사도신경(새번역)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교독문 _ 40번 시편 96편
(인도자)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회중)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의 이름을 송축하며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파할지어다
(인도자) 그의 영광을 백성들 가운데에, 그의 기이한 행적을 만민 가운데 선포할지어다(1-3)
(회중) 만국의 모든 신들은 우상들이지만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인도자) 존귀와 위엄이 그의 앞에 있으며
(회중) 능력과 아름다움이 그의 성소에 있도다(5-6)
(인도자)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회중)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9)
(인도자)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바다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외치고
(회중) 밭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즐거워할지로다
(인도자) 그 때 숲의 모든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
(회중) 그가 임하시되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라
(다같이) 그가 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11-13)
송영 _ 찬송가 1장 만복의 근원 하나님
기도 _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찬양 _ 찬송가 315장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봉헌 _ 마음을 다하여
말씀 _ 요한복음 1장 43~50절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오늘부터 요한복음의 말씀을 이어서 전하고자 합니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제자, 요한입니다.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요 19: 26-27)
요한복음 19장은 십자가 사건을 전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곁에 어머니 마리아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함께 서 있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이 말씀은 십자가 위에서 하신 7말씀 중 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는 이제 예수님의 어머니의 아들이 됩니다.
요한복음은 굳이 요한을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 자신이 요한복음의 기록자인 것을 생각해 보면 요한의 마음을 살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랑받는 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사랑을 받은 사람이 사랑을 하게 되고, 받은 사랑은 흘러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자신이 먼저 예수님은 사랑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먼저 자신을 사랑하셨음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겠지요? 그래서 요한은 요한일서 4장에서도 이와 같은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한일서 4:10)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먼저 예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그의 생명을 다해 우리를 사랑한 것입니다.
이 고백이 기독교의 전부이지 않을까요?
그러나 언제나 사랑은 믿을 수가 없으니, 비극이 되풀이 되기 마련인 것 같습니다.
이 사랑을 우리가 언제쯤 온 마음을 다해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 사랑을 언제쯤 우리가 온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을까요? 우리가 언제쯤 참으로 이 사랑 안에 거할 수 있을까요?
분명한 것은 우리의 모습 이대로,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신실하게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모든 말씀은 이 ‘사랑’과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요한은 대표적인 3명이 있습니다.
먼저 세례 요한(John the Baptist)입니다. 제사장인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아들이지요. 엘리사벳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친척으로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집에서 석달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은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마 3:3)라는 별명을 지녔으며, 예수님은 세례요한을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요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11:7-14).
두 번째는 마가 요한(John Mark)입니다. ‘마가’는 로마식 이름(Marcus)이며 ‘요한’은 유대식 이름으로 같은 말입니다. 마가 요한은 사도행전에서 등장하는데 마가의 집은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이 베풀어졌던 곳이자 오순절 교회가 탄생한 장소이기도 합니다. 마가는 바나바의 누이의 아들로 사도 바울의 제1차 선교여행 때 바나바와 동행하기도 하였지요. 훗날 로마에서 베드로의 동역자로 활동하였으며 70인의 제자(눅 10:1) 중 한 사람이었고, 베드로를 통해 마가복음을 기록합니다. 그리고 이집트로 가서 알렉산드리아 교회를 세우고 그곳의 감독이 되었다가 순교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 사도 요한(John the Apostle)입니다.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가 바로 이 사람입니다. 세베대와 살로메의 아들이며 야고보의 형제입니다. (마 4:21; 27:56; 막 15:40; 행 12:1-2). 그는 어부요, 시몬 베드로의 동업자로서 갈릴리 바다에서 생활했습니다.
갈릴리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 요한에게 세례요한의 소식이 들렸습니다. 아마도 요한은 세례요한을 찾아가 그를 따랐던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1장 35~37절의 말씀입니다.
다음날 요한이(세례요한) 다시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말했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세례요한과 함께있던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요한이었습니다. 어느 날 세례요한은 오실 예수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나는 이분을 알지 못하였지만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성령이 어떤 사람에게 내려와 머무는 것을 보게 되면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바로 그 분이다.하고 일러 주셨다.나는 보았으며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증언하였다.”(요1:33~34)
세례요한과 함께 있었던 요한은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라는 말을 듣자마자 즉시 예수님을 따라나섰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을 떠올리게 됩니다.
4복음서에 기록된 말씀이 조금씩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요.
먼저 마태복음 4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마4:18-22)
여기서 세베대의 아들, 요한과 야고보, 이 야고보의 아들이 사도 요한이며, 마태복음에서는 베드로와 안드레를 먼저 부르시고 그 후에 요한과 야고보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마찬가지로 마가복음도 같은 순서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그들이라는 표현을 써서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 이들 4명이 함께 고기를 잡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베드로의 동업자을 요한을 소개하고 이들 4명이 모두 한 자리에서 예수님을 만났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요한복음은 순서가 완전히 뒤바뀌어 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요1:36~42)
왜 요한복음의 순서가 유독 다른 걸까요?
그것은 요한이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세례요한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라’(요 20:31)
세례요한이 이 땅에 온 것은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기 위함이며 그의 곁에 이미 그의 제자들이 함께하고 있었음을 꼭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제자, 따르는 자입니다. 요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봅니다.
따르는 자, 제자가 우리입니다. 요한처럼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가 오늘 우리이길 소망해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또 다른 제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 그들 모두를 부르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베드로,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 그리고 요한복음은 또다른 2명의 제자를 부르시는 장면을 전하고 있는데 바로 빌립과 나다나엘을 부르시는 오늘의 말씀입니다. 다른 3개의 복음서는 세리 마태를 부르시는 장면만이 등장합니다.
“다음날 예수님께서는 갈릴리로 떠나가려고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시자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들은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가 이야기 합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또 예언자들이 기록한 그분을 우리가 만났소. 그분은 나사렛 출신 요셉의 아들 예수시오.”
그러자 나다나엘이 빌립에게 말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빌립은 베드로와 안드레의 고향 벳새다 출신으로 마가의 다락방에도 그가 함께 있었습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갑니다.
빌립에게 예수님을 만난 것은 엄청난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을 부르시는 예수님을 만난 이 사건은 그의 생애 중 가장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때 빌립은 나다나엘을 찾아갑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나다나엘이란 한 사람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엄청난 사건이 우리에게 일어난다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놀라운 일이 우리에게 일어난다면 우리는 누굴 찾아갈까요? 여러분은 단 한사람이 떠오르시나요?
그런데 조금 더 깊이 생각해면 그냥, 아무나 찾아갈 수는 없음을 곧 깨닫게 되는데 그것은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전하는 그 내용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언자들이 기록한 그분을 우리가 만났소.”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갈 수 있었던 것은 나다나엘 역시 “그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마도 빌립과 나다나엘은 만날 때마다 참으로 많이도 “그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빌립이 가장 먼저 떠오른 한 사람이 나다나엘이었던 것입니다. 항상 “그분”을 기다리며 이야기를 나눴던 사람, 그 사람이 나다나엘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와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요? 아니 누군가에게 우리는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요? 바라기는 “그분”을 알고 “그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다나엘과 빌립이 기다리던 “그분”은 예언자들이 기록한 “메시야” 참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할,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그분”을 만났다는 빌립의 이야기는 나다나엘에게 희망과 동시에 실망을 안겨줍니다. 나사렛 출신 요셉의 아들, 예수. 나사렛 출신이라는 말에 나다나엘은 그의 마음을 드러냅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나다나엘의 이 말을 통해 우리는 다시 한번 낮고 천한 자리에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게 됩니다. 그리고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분의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하는 능력이 됩니다. 우리가 태어난 곳, 우리가 서 있는 이 땅이 우리를 규정할 수 없음은 예수님께서 나사렛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의 이야기를 시작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다나엘이 나사렛으로 인해 실망하고 “그분”을 만났다는 빌립의 말을 믿을 수 없을 때 빌립이 다시 이야기합니다. “와서 보시오” 이렇게 빌립과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만나러 갑니다. 빌립과 함께 오는 나다나엘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보라,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 속에는 거짓이 없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말씀에 놀랐습니다.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이 더욱 놀랍습니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내가 보았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나다나엘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무화과나무는 그리 커다란 나무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 잎사귀가 커, 햇빛을 막아주기에는 충분하기도 한 나무입니다. 그러니 여러사람과 무화과나무 아래 있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는 혼자 햇빛을 피해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 있었을지 모릅니다. 도시 한 복판에 무화과나무가 심겨있던 것은 아닐터이니 도시 입구, 또는 조금 한적한 곳, 사람들이 많이 모이지 않는 곳에서 그는 세상과 조금은 거리를 두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그에게 지친 하루, 쉼이 필요해 무화과나무 그늘 아래 앉아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지치고 외롭고 막막하여 앉아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그를 예수님은 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스라엘의 왕으로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바라보고 계십니다. 보셨다는 말의 의미는 알고 계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께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 물으니 예수님은 보셨다고 대답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우리를 알고 계십니다. 그 아픔도, 그 외로움도 그 서러움도, 그 부끄러움도, 그 못남도, 그 막막함도, 그 억울함도, 그 선함도, 그 배려도, 그 희생도, 그 헌신도, 그 모든 순간을 예수님께서 보셨고 우리를 알고 계십니다.
그분, 하나님의 어린 양,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 우리의 왕이신 그 분이 우리를 보시고 아십니다.
찬양 _ 찬송가 393장 오 신실하신 주
주기도문(새번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