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기도

경배와 찬양 _ 찬송가 31장 찬양하라 복되신 구세주 예수

사도신경(새번역)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말씀교독 _ 교독문 133번 부활절

(인도자)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회중)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행 2:24)
(인도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회중)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전 15:57-58상)
(인도자)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회중)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인도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회중)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인도자)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 24:36-39)
(회중)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
(인도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회중)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 11:25-27)

송영 _ 찬송가 5장 이 천지 간 만물들아

기도 _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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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_ 찬송가 164장 예수 부활했으니

말씀 _ 요한복음 20장 1~18절

부활의 기쁨을 전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마리아를 통해 전해진 부활의 이야기입니다.

부활과 관련된 두 가지 성서의 주제는 (1) 빈 무덤의 발견과 (2)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출현입니다. (베드로 복음에는 부활기사가 나오지만) 정경에는 부활의 실제 장면이 나오지 않지요.

오늘 본문도 두 부분으로 나눠지는데, 성서의 부활 설화의 두 가지 유형과 같습니다.

(1) 빈 무덤의 발견(20:1-10)

  (a) 마리아에 의해

  (b) 베드로와 사랑하는 제자에 의해

(2) 부활하신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나타나시다(20:11-18)

  (a) 마리아가 빈 무덤에서 천사들을 보다(20:11-13).

  (b) 마리아는 예수를 보고, 동산지기라고 생각한다(20:14-15).

  (c) 예수께서 마리아의 이름을 부른 후에 마리아가 예수를 알아보다((20:16-17).

  (d)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예수의 나타나심을 보고하다(20:18).

예수께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고 여러 번 말씀하셨지만 부활 기사들 가운데 어느 것도 그 표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기사들은 “그 주간의 첫 번째 날에”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주간의 첫날 일찍이 아직도 어두울 때”(20:1)

아마도 이것은 일곱째 날의 예배(안식일)에서 첫 번째 날의 예배로의 변화를 강조하기 위해 의도된 단어의 사용이었습니다. 이제, 주간의 첫날, 예배하는 공동체가 시작되었고, 그들은 유대인을 넘어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이들입니다.

오늘이 주간의 첫 번째 날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주일’이라고 부르는 주간의 첫 번째 날에 모여 예배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그래서 우리의 주일예배는 매주 ‘부활’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그 아침에서 주일예배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주간의 첫 번째 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워, 빛이 없는 아침에 움직이는 일들이 있습니다. 조용히 그러나 빠르게 어딘가를 향해 걸어갑니다.

아라마대 요셉을 통해 예수께서 묻히신 곳, 예수의 무덤, 안식일은 유대인들에겐 그 어떤 것도 허락되지 않는 날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죽음도 안식일 전에 모두 끝이나야 했으며 안식일에 그 누구도 예수의 무덤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갔습니다.”(20:2)

사복음서는 모두 막달라 마리아가 빈 무덤에 가장 먼저 온 사람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그녀 혼자 빈 무덤에 나타나지만, 공관복음서는 다른 여인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마리아가 “아직 어두울 때에” 왔다고 전합니다. 공관복음서는 여인들이 새벽(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나 해 뜰 때(마가복음) 왔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 차이의 상징적인 의미는 공관복음서들은 어둠을 이기는 빛을 강조하고, 요한복음은 (이 이야기에서 이 시점에서) 죽음의 어둠과 누군가가 시신을 훔쳐갔다는 가정을 강조하는 데 있습니다.

“어두움”은 진실을 보지 못하는 것과 관련이 있을 수 있습니다(예를 들어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  이 본문에서 “보다”는 표현이 7회 사용되고 있습니다.

보는 것은 늘 본 것에 관한 어떤 믿음을 생기게 하지만, 늘 그 믿음은 틀린 것일 수 있습니다.

• 마리아가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본다(blepo)(1절)

• 마리아는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주님을 가져갔다”고 믿는다/생각한다(2절)

“사람들이 주님을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다”는 그녀의 설명은 예수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에 관해 아는 것이 요한복음 곳곳에서 등장하는 주제임을 상기하게 합니다. (예를 들어, 7:33-36; 8:21-23).

그리고 그 당시에 도굴은 골치 아픈 범죄였습니다. 도굴을 막기 위한 황제의 칙령도 있었습니다. 그녀와 다른 제자들이 누군가 시체를 훔쳐갔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 두 제자가 무덤 안에 놓여 있는 옷을 본다(blepo, 5절; theoreo, 6절).

• 사랑하시던 제자가 보고(orao) 믿는다(8절)

• 베드로는 믿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9절에서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고 암시한 것처럼, 사랑하시던 제자가 무엇을 믿었든지 간에 그 믿음은 불완전한 것이었습니다.

• 마리아가 무덤 안에 있는 두 천사들을 본다(theoreo)(12절).

• 마리아는 여전히 누군가가 시신을 가져갔다고 생각한다/믿는다(13절).

• 마리아가 예수를 본다(theoreo). (14절).

• 마리아는 자신이 동산지기를 보고 있다고 믿는다/생각한다(15절)

우리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믿고 있는지요?

우리는 예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아니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나사로의 부활을 보지 못하였고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보았던 그들도 믿지 못하엿습니다.

마리아가 보고 바르게 믿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예수의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예수께서 ‘마리아야!’라고 부르셨다. 이에 마리아가 돌아서서 ‘랍오니’라고 말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붙잡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내 하나님이시며 너희의 하나님이신 그분께로 올라간다고 전해라.”

그제서야 마리아는 예수를 믿었고 제자들에게 “내가 주님을 보았다[orao]”고 선언(고백)합니다.(18절)

제자들은 마리아가 본 것을 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본 것을 제자들에게 보여줄 수 없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보고 듣고 믿은 것을 그들에게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들음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는 것이 반드시 예수에 대한 바른 믿음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듣고 부활을 믿으시는 이 아침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마리아처럼 우리들의 '부활'의 이야기를 전하는 그리스도인이 도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요한은 우리에게 마리아가 무덤에 간 이유에 대해 전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녀가 울고(klaio) 있다는 말을 네 번 전하고 있습니다. (11절 2회, 13절, 15절).

마리아는 그날의 슬픔에 머물러 있습니다. 빈 무덤을 보고 그날의 기억이 그녀의 슬픔을 더했을 것입니다. 그녀는 울었습니다. 울며 몸을 굽혀 그 무덤 안을 들여다봅니다.

“여자여, 왜 울고 있느냐?” 예수께서 놓으셨던 그 자리에서 천사들이 말합니다.

“여자여, 왜 울고 있느냐?” 예수께서 그녀의 뒤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의 울음은 요한복음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예수와 나사로의 무덤에서 우는 것 외에 이 단어(klaio)의 다른 유일한 용례는 16장 20절입니다.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과도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16:22)

마리아는 예수의 죽으심에 관해, 그녀가 생각하기에 누군가 시신을 훔쳐갔고, 그 시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른다는 사실에 관해 울면서 애통해합니다. 그런데 16장에서 약속된 변화가 예수의 말씀과 임재를 통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고통과 울음이 기쁨으로 바뀌었고 예수는 (그녀를) 다시 보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는 장면은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이 제공하신 이미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내 인도하여 내느니라”(3절).

그래서 부활의 아침은 “기쁨”입니다. 약속의 성취가 완전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탄절보다 기쁜 날이 ‘부활절’입니다.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붙잡지 말라.” 도마에겐 예수의 ‘상처를 만져보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Fred Craddock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리아와 같은 제자들에게도 부활절은 그녀와 예수님을 과거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다 부활절은 새로운 미래를 열어준다. 지상 사역은 끝났고, 이제 높임을 받으시고, 영광을 받으시고, 영원히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이 시작된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16:7). 사실  믿는 자는 예수가 한 일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될 것인데,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14:12). 그러므로 예수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를 붙들지 말라”(20:17절)고 말하신다. 오히려 마리아는 가서 예수의 부활과 예수께서 하나님 계신 곳으로 승천하신 것을 선포해야 한다. 하나님 계신 곳으로부터 성령이 내려와서 교회를 인도하고 위로하고 능력을 수여하실 것이다.” [p. 246]

부활은 과거로의 돌아감이 아니라 미래를 향한 움직입니다. 마리아도, 우리도, 우리 교회도 부활 이후에 과거를 붙잡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훨씬 큰 미래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2024년 한해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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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_ 찬송가 165장 주님께 영광

주기도(새번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