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기도

경배와 찬양 _ 찬송가 9장 하늘에 가득 찬 영광의 하나님

신앙고백 _ 사도신경(새번역)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말씀교독 _ 교독문 134번 부활절(2)

(인도자)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회중)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인도자)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회중)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인도자)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 15:3-8)
(회중)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고전 15:14)
(인도자)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회중)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19-20)

송영 _ 찬송가 4장 성부 성자와 성령

기도 _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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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_ 찬송가 154장 생명의 주여 면류관

말씀 _ 요한복음 20장 19~31절 _ 믿는 자가 되라!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 날, 곧 주간의 첫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웠기 때문에 문들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 날은 안식 후 첫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 후 첫날, 즉 오늘 우리가 주일이라고 부르는 일요일 이른 아침에 부활하셨습니다. 제자들도 부활의 소식은 들었습니다. 바로 마리아들과 함께한 다른 여자들을 통해 주님의 소식을 전해 들었지요. 요한복음 20장 18절 말씀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내가 주님을 뵈었습니다.”하고 말했고 또 주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을 전해주었다.

그런데 제자들은 문을 잠가 놓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곳에 모여있었는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20절에서 22절 말씀에 ‘제자들’ ‘그들’이라는 표현은 제자들은 누군가의 집에 함께 모여있었음을 알 수 있게해 줍니다.

아마도 여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모여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제자들은 모두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을 찾아다니며 여자들은 부활의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여자들의 이야기를 허탄한 이야기로 생각했지요. 하지만 제자들은 다른 면에서 동요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여자들의 이야기를 들은 제자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분명하게 깨닫고 “두려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부활은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은 분명한 사실, 큰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직감이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면 산헤드린 공의회와 제사장들은 ‘그들’을 의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갑자기 큰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고 제자들은 모였습니다. 그리고 문을 굳게 잠갔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찾아 오셨습니다. 굳게 닫힌 문과 상관없이 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으라” 우리를 찾아오시는 예수님이 아니라면 우리는 과연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 믿게하기 위함이다.

요한복음의 목적은 청중들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 즉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하거나, 계속해서 “믿게” 하는 데 있습니다. 이 “믿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믿는 것을 통해, 예수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20:31).

제자들의 두려움 앞에 주님이 나타나신 것은 우연히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두려움은 실체가 없는 것 같으나 생생한 느낌으로 우리를 삼키고 우리를 잠식해 나갑니다. 그래서 결국 두려움에 잠식된 이들은 생명을 잃게 됩니다.

“믿다”는 헬라어 어근은 피스트(pist)입니다. 사전적인 영역에는 “신뢰”의 개념이 들어있습니다. 이 헬라어 동사의 뉘앙스에는 “무언가(또는 누군가)”를 신뢰하고, 무언가(또는 누군가)를 의지하는 것에서부터, 어떤 것이 사실이라고 믿는 것이 포함됩니다. 무엇보다 신뢰는 관계성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신뢰[ 信賴 , Vertrauen , Zutrauen ] - 헤겔
내가 어떤 타자를 신뢰한다는 것은 "나의 대자 존재(자기를 자기에서 분리하여 스스로 외화(外化)하면서 나타나는 상태)를 그가 그것을 인정하고 그것이 그에게 목적과 본질이라는 식으로 내가 그 안에서 인식한다"[『정신현상학』 3. 406]는 것이다. 즉 그가 나의 존재를 인정해준다는 것을 나 자신이 확신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뢰의 가장 소박한 존재방식이 '신앙'이다. 신앙한다는 의식은 신앙 대상 속에서 자기가 긍정되고 있다고 느끼고 그것과 일체가 된다.

 

헤겔의 말로 신앙인을 설명해 보면 신앙인은 신뢰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신앙인은 ‘절대자’에게 자신이 긍정되고 있다고 느끼고 절대자와 일체가 되는 경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는 신앙인은 하나님이 ‘나’를 인정하고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을 넘어 긍정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도 그를 믿지만 그가 나를 믿고 있다는 것을 긍정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믿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이지요. 신앙인은 서로 믿음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만이 진정으로 ‘타자’를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뢰가 없는 사랑은 ‘거짓’이기 쉽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흔히 ‘사랑’장이라고 불리는데 4절 ‘사랑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런데 사랑에 관한 설명이 시작되는 4절 이전에 1절부터 3절까지 말씀을 다시 깊이 읽어보겠습니다.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이 없으면’이라는 여러 경우를 정리해 해 보면 사랑이 없는 모든 결과는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결과가 ‘거짓’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랑이 있어야 할 곳에 사랑이 없는 이유가 바로 ‘신뢰’가 없기 때문입니다.

절대자(하나님)이 나를 긍정한다는 ‘신앙’ 즉 ‘신뢰의 존재 방식’이 없을 때 ‘사랑이 있어야 할 자리에 사랑이 없어지는 것’이지요. 절대자(하나님)와 일체의 경험, ‘신앙’ 즉 ‘신뢰의 존재방식’이 없을 때 ‘사랑이 있어야 할 자리에 사랑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요한복음의 말씀으로 돌아가보면, 그래서 요한복음의 기록의 목적은 오직 믿고 믿음으로써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누구든지 ‘믿음’이 있을 때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고백하는 자

20장에서 도마의 목소리는 두 번 들을 수 있습니다.

25절입니다.

“내가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눈으로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그분의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서는 결코 믿지 않을 것이오.”

예수께서 부활 후 제자들을 찾아 오셨을 때 그 자리에 ‘도마’가 없었습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8일이 지났습니다. 그 날 제자들은 여전히 모든 문들을 잠그고 한 제자의 집에 있었을 때, 그 틈에 도마도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다시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제자들을 찾아 오신 예수님은 다시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으라.”

그리고 도마에게 시선을 옮기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여기 내 손들을 살펴보라.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이 되지 말고 믿는 사람이 되라.”

그러자 즉시 도마가 대답합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믿지 않을 수 없는 주님을 도마는 만났습니다. 어찌 믿지 않을 수 있을까요? 도마의 생각, 그의 마음, 그가 뱉은 말을 알고 있는 주님이십니다. 어찌 믿지 않을 수 있을까요? 우리의 생각, 우리의 마음, 우리가 뱉은 말을 주님이 알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경험한다면 우리는 믿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의 생각, 우리의 마음, 우리가 뱉은 말을 주님이 알고 계시다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22절 말씀에서 그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성령을 받으라.”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주께서 ‘우리’를 아신다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 되라!

오늘 말씀의 결론은 앞서 요한복음의 기록목적에서 다룬 것처럼 ‘믿는 사람이 되라’일 것입니다.

27절 예수님의 말씀은 “되라”(ginou)는 동사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1)되다(to become) (2)“∼하다”(to be)

∙믿지 못하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충성스럽지 못한 사람이 되지 말고 충성스러운 사람이 되라.

∙불확실한 사람이 되지 말고, 확실한 사람이 되라.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신뢰하는 사람이 되라.

위의 본문 말씀을 존 웨스터호프(John Westerhoff)는 「Will Our Children Have Faith?』이란 책에서 믿음의 단계들의 사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1) 경험된 신앙(유아기 및 초기 유년기)- 행동을 모방하는 단계, 예를 들면 그 의미를 알지 못하고, 주의 기도를 하는 어린아이 단계. “이것이 우리가 하는 일이고, 이것이 우리가 행동하는 방식이다.”

(2) 입문하는 신앙(유년기 및 초기 청년기). 한 단체에 속하는 것. 하지만 여전히 그 단체가 하는 것을 모방하는 것이 전부이다. “이것이 우리가 믿고 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모임/교회이다.”

(3) 탐색하는/분석하는 신앙(후기 청년기) - “내가 믿는 것이 이것인가?”라는 질문을 한다. 도마가 이 단계의 한 사례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말한 것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스스로 어떤 확실성을 찾을 필요가 있다. 이 신앙의 단계는 초기 단계의 마음에, 머리를 추가하는 것이다.

도마는 그의 의문에도 불구하고, 제자들과 함께 머문다. 거기에서 그는 자신의 의문에 대한 답을 얻는다. 하지만 그 질문을 하는 단계는 27절에서 두 가지 방향으로 나아간다. 즉, 질문자가 불신의 단계에 있을 것인가, 아니면 신앙의 다음 단계로 옮겨갈 것인가?

(4) 자기의 신앙을 갖는 단계(초기 성년기) - 이 단계는 탐색하는 단계를 거쳐야 한다. “내가 믿는 것이 이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 후에 “이것이 내가 믿는 것이다”라고 선언하는 단계에 도달한다. 도마의 장면은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는 개인적 고백으로 끝난다. 도마처럼 탐색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은 다른 제자들의 입에서는 들을 수 없는 고백이다. 하지만 이것은 증언하고, 그 증언을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강하고 인격적인 신앙이다. 다른 제자들도 분명 이 단계의 신앙에 도달했다.

인격적인 신앙이 바로 의심을 넘어 신뢰에 이른 도마의 신앙입니다. 맹목적인 신앙, 묻지마식 신앙은 ‘신앙’이 될 수 없는 이유를 우리는 ‘신뢰’를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면 신뢰의 가장 소박한 존재방식이 '신앙'이라면 ‘맹목적’이거나 ‘묻지마’식은 신앙의 조건이 성립될 수 없으며 오히려 믿음이 없음을 드러내는 것일 뿐입니다.

일단 신뢰가 형성되면 신뢰관계는 그 후의 협력을 통해 육성되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예수와 도마 사이의 소통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20:24-29). 예수는 자신의 몸을 도마가 만지게 하셨습니다.

도마는 예수의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라는 예수의 말씀을 그대로 따릅니다. 신뢰하라는 예수의 권면은 이러한 행동의 연속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반응과 행동, 즉각적인 반응과 행동이 신뢰의 증거입니다. 또한 신뢰는 일회성이거나 절대적인 동의가 아니라 육성되고 성장할 수 있는 변화의 가능성을 통해 깊은 신앙으로 이끌어 냅니다.

∙믿지 못하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충성스럽지 못한 사람이 되지 말고 충성스러운 사람이 되라.

여기서 되라는 명령은 ‘신뢰’가 있을 때 실현될 수 있습니다. 그가 나를 믿고 있다는 것을 긍정할 때, 적어도 그가 내게 말씀하실 때 내가 그를 믿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나를 믿고 있다는 것을 아는 상태, 즉 '신뢰'의 관계에 있을 때, 신앙인으로 신앙생활을 할 때 실현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된다는 말입니까?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이 의심은 ‘믿음 있음’과 ‘믿음 없음’의 사이에서 질문이라면 이 질문을 넘어 ‘신뢰’의 관계 속으로 들어오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이제,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시길 소망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살아간다면 ‘될’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영면하였습니다. 그의 휴가는 67년 전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은 힘없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 대부분이 자신의 운명을 손에 쥐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깊이 인식했고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삶을 위해 자신이 기여하길 바랐다고 합니다. 우리가 더 깊은 신앙, 신뢰 안에서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2025년 부활절기가 우리를 더 깊은 신앙으로 이끌어주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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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_ 찬송가 539장 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

주기도(새번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