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기도
경배와 찬양 _ 찬송가 10장 전능왕 오셔서
사도신경(새번역)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말씀교독 _ 교독문 122번 주현절(2)
(인도자)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회중) 신들 앞에서 주께 찬송하리이다
(인도자)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회중)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높게 하셨음이라(시138:1-2)
(인도자) 여호와여 세상의 모든 왕들이 주께 감사할 것은 그들이 주의 입의 말씀을
들음이오며
(회중) 그들이 여호와의 도를 노래할 것은 여호와의 영광이 크심이니이다
(인도자) 여호와께서는 높이 계셔도 낮은 자를 굽어살피시며 멀리서도 교만한 자를
아심이니이다(시138:4-6)
(회중)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보상해 주시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오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시138:8)
송영 _ 찬송가 2장 찬양 성부 성자 성령
기도 _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찬양 _ 찬송가 293장 주의 사랑 비칠 때에
말씀 _ 요한복음 1장 43~51절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오늘의 말씀 요한복음 1장은 예수께서 누구신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여 세례요한의 증언, 그리고 35절부터 51절까지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께서 지나가는 것을 보시고 그와 함께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
요한의 말을 들은 두 제자가 예수께 나아갑니다. 그들을 만나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라, 그러면 보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께서 머무신 곳을 보았고 예수를 따랐습니다.
그 둘 중 한명이 안드레, 바로 시몬 베드로의 동생입니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소” 안드레는 베드로를 예수께 데려갔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너는 게바라고 불릴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알고 있는 베드로가 탄생하게 됩니다.
그 다음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떠나가시려고 하시다 안드레와 베드로의 고향 벳새다(고기잡의 집이라는 뜻으로 갈릴리 북쪽 어촌) 출신인 빌립을 만나셨습니다. 그 빌립이 어떤 사람인지 요한복음 1장에선 설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빌립은 예수를 만났고 예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나를 따르라” 그 음성을 들은 빌립은 나다나엘을 찾아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했고 또 예언자들이 기록한 그분을 우리가 만났소. 그분은 나사렛 출신 요셉의 아들 예수시오.”
그러자 나다나엘이 묻습니다. “갈릴리에서 무슨 좋은 곳이 나올 수 있겠소?”
빌립이 대답합니다. “와서 보시오”
이렇게 오늘 본문 말씀의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사도 요한의 의도를 고민해 보았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인데, 우리가 아는 그 12제자의 시작인데, 그들은 예수와 함께 삶과 죽음을 함께하고 마침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그들과의 만남이 이렇게 단순하게? 아무 이유없이? 어떤 거대한 사건이 없이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을 마친 요한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그런데 의도와 동기, 거대한 사건이 “만남”의 이유는 아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남” 그 자체에 주목해야하는 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의도치 않았어도 그 ‘만남’으로 모든 인생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다나엘과 예수님의 ‘만남’이 그렇습니다.
나다나엘은 선입견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을 보지 못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셨고,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와서 보라”"고 초대했을 때 그는 상상하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예수의 출신(기원)에 질문은 요한복음 곳곳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에 대해 가졌던 웅장한 기대가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대의 맥락을 고려할 때, 우리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며 숨죽여 조롱하는 말을 하면서 그 당시의 일반적인 견해(참조, 요7:41,52)를 보여주는 나다나엘을 이해할 수가 있게 됩니다.
누가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가 권력의 중심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진 곳 출신이라는 것을 상상이나 했을까요? 갈릴리의 나사렛에서 메시아가 온다고?!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다나엘(또는 우리)의 제한적인 기대에 갇혀계실 수 없고 요한은 우리의 기대를 뛰어 넘는 예수의 출신을 선언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살았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핵심 주장입니다. (요 1:14).
예수께서 나다나엘을 속에 간사함이 없는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언급하실 때, 떠올리게 되는 것은 야곱에 관련한 구약성서의 이야기들입니다.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았으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속임과 간사함을 사용한 사람으로 성서에 등장합니다. 나다나엘의 솔직함은 야곱의 이중성과 대조되지요.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자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나다나엘의 선언은 천사들이 사다리를 타고 하늘로 오르내리는 꿈을 꾼 이후의 야곱의 경이감을 울려 퍼지게 한다.
야곱의 꿈은 우리가 본문 끝에서 예수께서 묘사하는 이미지와 무척 닮아 있습니다(창 28:12, 16; 요 1:51). 야곱은 “여호와께서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다”(창28:16)고 외치는데, 우리는 이 말들이 나다나엘에게도 나왔다고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나다나엘이란 이름은 “하나님이 주셨다”는 뜻인데 적합한 이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이보다 더 큰일”을 볼 것이라는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서 “더 큰”은 그의 회의보다 더 큰, 예수의 예지력 있는 지식보다 더 큰, 그가 예수에게 붙인 칭호들보다 훨씬 더 큰 것을 뜻합니다.
(요한복음의 설화의 시점에서) 내일 갈릴리 가나의 나다나엘의 고향에서 벌어진 잔치에서, 나다나엘과 다른 사람들은 예수의 첫 번째 표적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는 그 표적을 통해 “그의 영광을 나타내셨고 제자들은 그를 믿었다”(요2:11).
“나를 믿느냐?” 예수께서 나다나엘에게 말씀하셨듯이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느냐? 앞으로 너는 이런 일들보다 더 큰 일들을 보게 될 것이다.”
내일,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될 것입니다. 오늘 예수를 만나시길, 예수를 만나 ‘그는 나의 구원자, 바로 나의 메시야’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여호와께서 여기 계십니다.
와서 보라.
찬양 _ 찬송가 304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주기도(새번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