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기도
경배찬양 _ 찬송가 10장 전능왕 오셔서
신앙고백 _ 사도신경(새번역)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교독문 _ 57번 시편 130편
(인도자)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회중)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인도자)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회중) 주여 누가 서리이까
(인도자)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회중)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인도자)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회중)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인도자)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회중)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인도자)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회중)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다같이)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1-8)
송영 _ 찬송가 3장 성부 성자와 성령
기도 _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찬양 _ 찬송가 286장 주 예수님 내 맘에 오사
봉헌 _ 마음을 다하여
말씀 _ 요한복음 5장 38~42절
늘 스스로 묻곤하지만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물음이 있습니다.
나는 왜 기독교인가? 내게 아무 유익이 없어도 나는 기독교인으로 살아갈 것인가?
어떠한 불의에도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 용기가 있는가?
기독교인으로써 당하는 고난을 나는 의연하게 받아들이고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는가?
나는 지금, 기독교인으로 성도답게 살아가기 위하여 어려움을 무릅쓰고 있는가?
나는 기독교인으로 세상의 소금과 빛, 사명을 다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하늘나라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갖고 있는가? 과연 나는 이 세상보다 하늘나라를 더 사랑하고 있는가? 나는 진정 하늘나라가 있음을 믿고 있는가? 천국과 지옥을 모른다면 나는 무엇에서 기독교의 진리를 찾고 있는가?
과연 나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그 무엇보다 사랑하고 있는가?
이 세상 최고의 가치와 하나님의 사랑을 바꿀 수 없다고 믿고 있는가?
어느 것 하나도 쉽게 대답을 내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더 이상 교회에서 이러한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게 유익이 없다면 도대체 교회에 나올 이유가 있을까요?
도대체 무엇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교회에 나오시오. 꼭 교회에 갑시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며칠 전, 부천에서 잘 성장한 교회, 중견교회 목사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서로 놀라고 말았습니다. 어버이날을 맞이하여 어르신들을 위해 카네이션을 준비하려는데 만65세이상으로 하려니 요즘은 70세나 되어야 노인이라고 할 수 있으니 만70세 이상으로 인원을 파악해 보니 교인의 60%이상이 만70세 이상이어서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나 노령화가 되었는지 깜짝 놀라셨다고 말씀하셔서 서로 놀랐습니다.
그리고 다시 선배목사님으로부터 카톡이 왔습니다. 비개신교인의 교회에 대한 인식 설문조사 결과였습니다.
코로나로 인한 교회의 사회적 이미지,
비개신교인 82.4% 코로나 확산, 개신교 책임이 크다.
교회가 코로나19로 인해 어려운 이웃을 돕고 있다?라는 질문에는 그렇다고 대답한 비개신교인은 10.1%, 그렇다고 대답한 목회자는 68.7%였습니다.
교회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만들어진 이유로는 교회의 이기주의(72.8%)와 개신교인들의 행동에 대한 실망(68.4%), 목회자의 윤리성 하락(36.4%)을 그 이유로 뽑았습니다.
한국교회의 억울함에 대해서는 굳이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늘 진실이 이긴다고 생각해 왔다면, 비개신교들이 생각하는 그러한 교회가 아니라면 반드시 교회는 세상의 소망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우리가 정말 기독교인으로 살아가고 있는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베데스다라는 연못에 살고 있던 38년된 병자의 이야기입니다.
베데스다(Bethesda)는 아람어 ‘베트 헤스다’의 헬라어 음역으로 ‘자비(은혜)의 집’이란 뜻입니다. 예루살렘 동북쪽 양의 문(베냐민 문) 곁에 있던 연못이라고 전해지고 있는데요. 우리의 상상과는 조금 다른 연못으로 추정됩니다. 이 연못 주변에 헤롯 대왕은 5개의 행각을 세웠는데요. 연못은 주기적으로 물이 그쳤다 이어졌다 하는 간헐천(間歇泉)으로, 물이 끓어오른 뒤 제일 먼저 들어가는 자는 병을 고친다는 전설이 예수님의 시대까지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양의 문은 느헤미야 때 대제사장 엘리아십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성전으로 들어가는 제물, 즉 양이 들어가는 문을 말하고 있습니다.
연못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살펴보면 고대부터 키드론 계곡에서 흘러온 빗물을 모아 성전에 물을 공급하는 역할을 했으며, 직사각형의 형태로 깊이가 20m 정도 되었고, 면적은 120m x 60m 정도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연못 주변에는 의학적∙종교적 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건물들이 세워졌고 특히 연못 동쪽에는 BC150년경부터 AD70년경까지 욕실과 병실 등이 지어져 대중들을 위한 치료소로 활용되었다고 합니다. 요한복음에는 모두 다섯 개의 회랑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으로 향하시던 예수님은 이 연못 가에서 한 남자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십니다.
예루살렘 양의 문 곁에, 베데스다 연못 가엔 그 남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요한은 연못 주변으로 5개의 행각이 있었으며 그 안에 병자, 맹인, 다리를 저는 사람, 혈기가 마른 사람들이 누워있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천사가 내려와 물이 움직이길 기다렸고 움직이는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이든지 낫게 되었으며, 그래서 그들은 연못 주변 행각을 집으로 삼아 살아가고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병자들로 가득한 연못 주변, 그 곳에 예수님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한 남자가 누워있습니다.
왜 그 남자에게 다가가셨을까요? 요한은 예수님께서 그가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것을 아셨기때문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 많은 병자들 사이에서도 너무도 야위고 지친 한 남자, 그의 눈동자를 그려봅니다. 어떠한 눈빛이었을까요? 그의 공허한 눈빛과 동시에 간절함과 체념이 섞인 점점 생기를 잃어가는 그의 슬픈 눈빛을 그려봅니다. 그의 앞에 예수님이 서 계십니다. 그는 예수님을 알아보기는 했을까요?
예수님께서 그 남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그 남자가 대답합니다. “물이 움직일 때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동안에 이미 다른 이들이 먼저 내려갑니다.”
처음 그가 이 베데스다 연못에 도착했을 때에는 아마도 그의 곁에도 그를 도와줄 사람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연못의 기적은 가장 먼저 물에 들어가는 사람에게만 허락되었고 수많은 병자들 사이에 가장 먼저라는 말에 해당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같은 시각에 모든 병자들이 연못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를 도우려했던 이들도 안간힘을 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남자는 걸을 수 없는 사람이었고 그 무거운 몸을 이고 연못에 가장 먼저 도착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그 남자의 38년의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아마도 그 남자도 어느 날부터는 그 연못을 떠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를 다른 곳으로 옮겨줄 사람조차 없어진 아픈 세월이 그렇게 흘러갔습니다.
그런 그 남자의 대답에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그렇게 그는 일어나 걸어갑니다. 그 엄청난 38년의 세월을 생각해보면 그 순간은 그저, 찰나일 뿐입니다. 이렇게나 빨리 일어날 수 있음에 그 남자도 놀랐을 것입니다. 이렇게 걷게 되는 세월이 38년이었다니 그 남자의 감정을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 놀라운 기적, 한 남자가 다시 태어난 그날의 이야기는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하필, 그날이 안식일이었던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안식일에 사람을 위하여 일을 하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은 그러한 거룩한 날입니다.
그 안식일에 누워있던 한 남자가 일어나 걸어 그의 자리를 떠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 남자는 38년동안 내가 보았던 그 남자, 걸을 수 없는 그 남자가 일어나 38년 된 그의 자리를 떠나려고 합니다.
“도대체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한 사람이 누구냐?”
그 때 그는 예수님의 이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후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나 그 남자는 그제서야 예수님의 이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신을 고친 이가 예수님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그날의 놀라운 기적은 논란과 분노의 이야기로 전복됩니다.
요한복음 5장 16절부터 47절까지는 유대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 중에 3가지의 말씀이 저의 마음 속 질문을 떠올리게 하였습니다.
(나는 왜 기독교인가? 내게 아무 유익이 없어도 나는 기독교인으로 살아갈 것인가?.......)
말씀을 들었다는 너희 속에 그 말씀이 거하지 아니한다. (38절)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한다. (40절)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다. (42절)
왜 유대인들은 그 베데스다 연못의 그 남자가 일어나 걸어가는 것을 보지 못하였을까요?
아니 분명 그 남자가 걸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안식일을 먼저 생각하게 되었을까요?
그 날이 어떤 날인지 생각하기보다 그 남자를 왜 먼저 생각하지 못하였던 것일까요?
그것은 다만 그들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진정으로 영생을 얻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말씀을 들었으나 그들 속에 말씀이 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너희가 나에게 와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냐?”
38년 베데스다 연못에 누워있던 그 남자가 걸어가는 모습을 진정한 기쁨으로 바라 볼 수 있다면 그것이 아마도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 남자가 일어서는 순간, 왈칵 눈물을 쏟는다면 아마도 진정으로 영생을 얻기를 원하여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마음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남자가 다시 삶의 첫발을 내딛는 모습에 감격한다면 아마도 말씀이 우리 안에 함께 살아있다는 것일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게 아무 유익이 없어도 다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실, 베데스다 연못에 그 남자가 일어나 걷는 것은 내게 유익이 없습니다. 그래도 그 남자의 걸음에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마음이 우리 안에 가득하길, 그렇게 나의 유익과 상관없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다만 구원받은 기쁨으로, 말씀이 우리 안에 살아있어 날마다 영생을 소망하며 다른 것은 구하지 않으며, 다만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구할 것을 구하는 성도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찬양 _ 찬송가 410장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주기도문(새번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