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기도
경배와 찬양 _ 찬송가 20장 큰 영광 중에 계신 주
사도신경(새번역)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말씀교독 _ 교독문 28번 시편63편
(인도자)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회중)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인도자)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회중)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인도자)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회중)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인도자)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회중)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인도자)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회중)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인도자)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회중)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다같이)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1-7)
송영 _ 찬송가 3장 성부 성자와 성령
기도 _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찬양 _ 찬송가 286장 주 예수님 내 맘에 오사
말씀 _ 요한복음 6장 51~59절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이번 주 본문의 대략적인 구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다[(43-50), 51절]
∙유대인을 사이에서의 다툼(52절)
∙예수께서 말씀하시다(53-58절)
예수의 말씀하시다(43-51절)
51절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며,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내 살이며, 내 살은 세상에 생명을 준다.”
예수는 두 개의 수식어를 사용해서 자신을 “떡”이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1. 살아있는/생명/생명을 주는
“나는 생명의 떡이다”(zoe의 소유격)
2. 하늘에서(ek) 내려온(coming down)
"하늘에서/로부터 떡을(31,3절- 32b절에서는 만나와 예수에 대해 이 표현이 사용됨)
"하늘에서 내려온 떡“(33,41,50절; 이 표현은 늘 예수에게 사용됨)
생명을 주는 떡? 하늘에서 내려온 떡?
여러분은 어떤 것에 더욱 관심이 있으신가요?
하늘의 떡이 만나이든지 예수이든지 간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그 둘 모두의 근원입니다. 무엇보다 요한복음에서 강조되는 것은 예수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의 기원은 하늘에 있습니다. 예수는 바로 그곳에서 오셨습니다.
하늘에서부터 땅으로의 이러한 “하강”은 “살/육신”(sarx)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하고 1장 14절을 기억하게 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럼 “살아 있는 떡” 또는 “생명의 떡”은 무슨 의미인가? 요한복음서의 앞부분에서 “살아 있는”은 물을 수식할 때 사용되었습니다.(4:10, 11, 7:38). “살아 있는 물”은 문자적으로 우물이나 물탱크나 웅덩이의 물같이 고여 있거나 멈춰있는 물과 대조되는 흐르는 물을 가리킵니다.단어 자체는 신선하고 생명을 주는, 아마 맛도 더 좋은 물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이 문구를 은유적으로 단지 흐르는 물보다 더 나은 어떤 것을 뜻하는 의미로 사용하신 것 또한 분명해 보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자신과 관련이 있으며 그가 세상에 제공하는 것과 어떤 관련이 있는데, 물은 “생명”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예수는 풍성한 생명의 원천이십니다.(10:10).
“생명”은 무엇입니까?
푸르른 나무? 흔들리는 가지? 만개한 꽃과 열매?
성서에서 ‘생명’은 아버지 안에(5:26), 예수 안에(1:4;5:26,40) 있는 것이고, 예수 그 자신입니다.(11:25;14:6).
“영원한 생명”은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다는 뜻이고, 그 관계는 지금 시작해서 영원히 지속됩니다.
“살아 있는 물”과 “살아 있는 떡”(또는 “생명의 떡”)으로서의 예수는 그 관계를 맺고 유지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입니다.
아버지(Father)께서는 예수를 통해 우리와 영원한 생명을 주는 관계를 맺으십니다.
6장에서 헬라어 pater(아버지)가 15회 나오지만, theos (하나님)는 7회 나옵니다. 요한은 pater를 하나님을 지칭할 때에 사용할 뿐만 아니라(27, 32, 37, 40, 44, 45, 46, 46, 57, 57, 65절), “조상들”(31,49, 58절)과 예수의 이 땅의 아버지인 요셉을 지칭할 때에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조상들은 사람의 정체성과 생명의 근원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와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자녀라는 의미가 됩니다.
종교는 일반적으로 신이나 신들을 이해하고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이해하고 관계를 맺는 점에서 다른 종교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사람이 신과 갖는 다른 유형과 특별한 관계를 보여줍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신과의 관계가 보통 숭배자가 해야 하는 일, 예를 들어 올바른 예배, 제물 혹은 행동에 근거하지만 기독교에서는 그 관계가 아버지께서 하신 일, 즉 세상을 사랑하시고 아들을 보내신 것 등에 근거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제대로 이해하려면 “아들”의 계시가 필요합니다.
아들의 계시, 즉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아들의 계시입니다.
계시는 언제나 신비, 또는 비밀을 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그 자신을 계시하셨지만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 계시를 들은 유대인들 간에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유대인들 사이에서의 다툼(52절)
NRSV의 “그들 사이에 논쟁이 있어”라는 번역과 헬라어 번역이 조금 다릅니다. 헬라어로는 “육체적인 것이든 비육체적인 것이든지 간에, 진지하면서도 강력하고 심각한 갈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Lowe & Nida).
어찌 보면 예수께서 제공하시는 것은 조상들이 받았던 떡과 비슷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선물로서 하늘로부터 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만나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어떤 것에 속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유대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새롭고 다른 어떤 것입니다. 이러한 지점들이 과거에 머물고자 하는 이들과 심각한 갈등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작은 차이가 명품을 만들기도 하지만 작은 차이가 갈등을 더욱 심화 시키는 것 같습니다. 같은 것을 말하는 것 같으나 결코 같을 수 없는 그런 지점들을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것은 상당한 내적 고민이 필요한 지점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유대인들이 묻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그들에게 “어떻게”의 질문에 대답하시지 않고 그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실 필요성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어떤 유명한 광고처럼 말입니다. “그것을 하기만 해”(Just do it)
먹고 마시는 믿음
Brown: “공관복음서가 성례의 제정을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그 성례가 기독교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설명하는 것이 요한복음이다”라고 설명합니다. [pp. 292-293].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본문에서 열거하는 (성찬의) 유익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너희 속에 생명이 있다(53절, 현재시제임))
∙ 너희는 영생을 가지고 있다(54절, 현재시제)
∙ 예수께서 너희는 마지막 날에 살리실 것이다(54절, 미래시제임)
∙ 너희가 예수 안에, 그가 너희 안에 거하신다(56절, 현재시제)
∙ 너희가 예수로 말미암아 살게 될 것이다(57절, 미래시제임)
∙ 너희가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58절, 미래시제임)
이 모두는 선언들입니다! 우리는 먹고 마시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받게 될 유익들을 선언할 수 있고, 선언해야만 합니다.
현재의 지금과 미래에 모두 강조되는 것은 “생명”이나 “살아 있는”(living)입니다. 이 생명은 “먹고 마시는” 이미지로 제시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수의 생명의 원천은 아버지로부터 온 것입니다.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고 자기의 뜻보다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데서 온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명의 원천은 우리와 예수의 관계에서 옵니다. 예수를 믿고, 예수를 “먹고 마시고,” 그리고 예수의 보내심을 받고 예수께 순종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는 이 거친 이미지는 또한, “내 안에 계신 예수”에 대한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주관적인 이해에 대한 교정법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는 우리 마음이나 머릿속에 계실 뿐만 아니라, 예수는 (떡과 포도주로서) 우리의 전 존재 구석구석에서 우리의 일부가 되십니다. 좀 더 정확하게는 우리 몸의 모든 세포에 있는 작은 모세관을 통해 흘러 다닐 것입니다.
우리가 느끼던 느끼지 않던 간에, 객관적인 진리는, 우리가 떡을 씹어 먹고 포도주를 마실 때, 어떤 식으로든 예수의 살과 피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고, 예수는 우리의 몸을 통해 흘러나오고,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약속한 유익들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아멘
찬양 _ 찬송가 425장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주기도(새번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