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기도

경배와 찬양 _ 찬송가 10장 전능왕 오셔서

사도신경(새번역)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말씀교독 _ 교독문 39번 시편95편

(인도자)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회중)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인도자)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회중)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인도자)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오
(회중)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
(인도자) 땅의 깊은 곳이 그의 손 안에 있으며
(회중) 산들의 높은 곳도 그의 것이로다
(인도자) 바다도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회중)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
(인도자)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회중)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다같이)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오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1-7상)

송영 _ 찬송가 4장 성부 성자와 성령

기도 _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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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_ 찬송가 88장 내 진정 사모하는

말씀 _ 요한복음 6장 60~69절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오늘 말씀의 개요는 다음과 같습니다.

∙56-58절은 이 장에서의 예수의 마지막 강론의 일부이다.

∙59 절은 지리적인 설명이다.

∙60-69 (70-71) 절은 제자들의 반응을 제공한다.

“예수의 참된 제자가 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진리를 알도록 인도하는 예수의 말씀 안에 계속 거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 용어가 어떻게 사용되었든지 간에, 예수를 따르는 것은 지속적인 행위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한 번의 회심 사건에 아니라, 예수를 향해 “돌아서거나” 예수의 뒤로 가는 매일의 회심입니다.

그리고 결국 예수의 참된 제자가 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아멘”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히브리어: אָמֵן amen 은  "그러하다, 긍정적이다, 확실하다, 진실되다" 등을 표현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영어에서 아멘이란 단어에는 '진심으로, 진정으로, 참으로'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특히 ‘amen to that’ 구어체로 매우 강력한 의사표시를 할 때 사용되고 '믿습니다'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어려울 수 있습니다. 60절에서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이 수군거립니다. “이 말씀은 매우 어렵구나. 누가 그것을 들을 수 있겠는가?” 이에 61절에서 예수께선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이 말이 너희 마음에 걸림이 되느냐?”

예수께서 선포하신 말씀 중에서 받아들이기에 어려운 말씀은 이런 말씀들을 것입니다.

“네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원수들을 사랑하라; 너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 너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하라”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이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어려운 말씀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요한복음 13:34-35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이 말씀은 어떠신가요? 역시나 어려운 말씀이지요!

이 말씀은 너무도 훌륭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서로 사랑하는 장소로 생각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이 말씀만큼 어려운 말씀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어려움”에 헤메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실 이 말씀은 3주 전부터 계속 우리들을 흔드는 말씀입니다.)

“이 말이 우리 마음에 걸림”이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61절 “살리는 것은 영이요 육은 무익하다” 65절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라는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 보십시오.

그리고 63절에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들은 영이다.”

우리가 “어려움”에 헤메이는 이유는 우리가 늘 “육”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육과 영

O’Day (John, The New Interpreter’s Bible) 는 63절에 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이 절에서의 영과 육 사이의 대조를, 이 절들과 6장의 나머지 부분과의 관계를 해석하는 열쇠로 간주한다.

(52절의 “유대인들”처럼) 이의를 제기하는 제자들은, 예수가 말한 ‘살’을 바르게 지각하지 못한다. 그들은 예수의 육신만을 본다. 그들은 “말씀이 육신이 되심”을 보지 못한다(1:14). 63절에서의 예수의 말씀은 이런 오해를 드러낸다. 육으로서의 육은 소용이 없다. 영만이 육에 생명을 준다. 영은 인자 안(비교 1:33)에, 그리고 예수가 말하는 말씀 안에 거한다. 63절은 1장 13절과 3장 4-8절을 떠올리게 한다. 육과 영으로 태어난 새 생명은 신자들에게 가능하다. 생명에 대한 이해가 육 안에서 가능한 것에 대한 이해에만 머물러 있다면, 아무 것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영과 육을 다 갖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의 핵심이다.

요한복음 6장 63절은 육(살)이 구원하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은 단지 그것이 생명을 제공하는, 예수의 성령으로 충만한 말씀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살을 먹고 피를 마시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성령으로 충만한 인자의 살과 피를 먹으라고 하시는 중이다(비교, 6:27).[p.610].

여기에서 제시된 “영”은 “말씀”과 관련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은 로고스(logos)가 아니라 르헤마 또는 레마 (rhema)입니다.

레마는 그 말의 배후에 있을 수 있는 “논리”(logic, logos)보다는, 음성 또는 실제의 말(내용)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로고스와 레마는 동의어일 수도 있지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레마)으로 살 것이라”

마 4:4에 따르면 그 순간 그 음성, 그 말씀을 이해했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이든지 간에 68절에서 사용되고 있는 레마(rhema)는 베드로가 그 말을 이해했다는 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주님은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가지고 계십니다.”

베드로는 예수의 말씀이 영이고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목해야 하는 점이 다시 보입니다. 어디로 가겠습니까? 베드로가 예수께 대답합니다.

여기서 고등학교 국어 시간이 열심히 암기했던 ‘안빈낙도’가 떠오릅니다. 과거의 출세와 명예, 임금의 곁에서 충성을 다했던 신하는 ‘붉은 먼지, 홍진’같은 속세, 한양을 떠나 자연에 머물며 노래하는 시의 주제 말이지요.

베드로는 다시 ‘속세’로 돌아갈 마음이 없습니다. ‘육’에 관심을 두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일단 마음이 그렇습니다. 이제, ‘영’에 마음을 두겠다는 것입니다. ‘영생’에 마음을 두겠다는 것이지요. 논리적으로 알고 하는 대답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말씀(레마)를 들었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이시라고 믿어왔고 알았습니다.”

우리도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단지 “육”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세상에서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아니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까?

강점과 약점을 두루 지닌 베드로는 우리들의 신앙의 훌륭한 본보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는 완전하지 않지만, 빛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는 상황을 오해하고 심지어 체포와 재판의 순간에 예수를 부인하지만, 그는 종종 예수의 말씀을 바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생각에는 그 누구도 뛰어난 스승, 예수보다 더 잘 가르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습니다.”는 고백은 제자들이 예수를 믿게 된 과정에 대한 베드로의 묘사이지요.(6:69). 이것이 그의 믿음의 과정을 아름답게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그 어떤 실수와 실패를 덮고 예수의 참된 제자가 된 베드로는 단지 그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예수를 향해 “돌아서거나” 예수의 뒤로 가는 매일의 회심을 통해 예수의 말씀 안에 계속 거했을 뿐입니다.

“믿음은 그것이 사실일 수 있다는 모험에서 시작하여, 조금 지나면 초기의 믿음보다 더 확실하고 견고한 무언가로 변한다. 믿음은 지식, 즉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얻은 사실들을 통해 획득한 지식으로 성장한다.”(Buttrick, ed., The Interpreter’s Bible, 576.).

믿음은 그것이 사실일 수 있다는 모험에서 시작한다는 신학자의 이 설명이 제 가슴에 깊이 남았습니다.

여러분, 더 이상 ‘어려운’ 말씀에서 헤메이지 마시고 ‘말씀의 걸림의 늪’에서 헤메이지 마시고 “육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아니, “아버지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아무도 예수께로 올 수 없다”는 말씀에 의지하여 믿음의 모험을 시작해 보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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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_ 찬송가 393장 오 신실하신 주

주기도(새번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